MBC의 관리·감독 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에서 사상 최초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행위)가 진행됐다.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발언으로 3000만원 배상 판결을 받은 고영주 이사장과 여당추천 이인철 이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방문진 야당 추천 이사3인(이완기·최강욱·유기철)은 지난 달 30일 이사회 결의사항으로 ‘고영주 이사장의 거취에 대한 건’을 안건으로 제출했다. 방문진은 2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정기이사회에서 이 안건에 대해 논의하기로 돼있었다.

방송문화진흥회ⓒ미디어스

야당 이사들은 고 이사장이 ‘문재인은 공산주의자’ 발언으로 3000만원 손해배상 판결을 포함해 ▲이념 편향성과 사법부 경시 태도 ▲방문진 책임 방기(불법·부도덕 옹호) ▲이사회 운영 불공정성 등을 지적하며 ‘불신임’을 묻고자 했다.

이완기 이사는 안건 논의에 앞서 “고 이사장 체제 1년의 방문진은 ‘다수’가 지배하는 ‘이념 전투의 장’이었다”며 “MBC의 공적 책임 실현과 경영 관리·감독이라는 방문진 본연의 임무는 폐기됐고, 불법·부도덕·무능으로 점처된 일부 MBC임원들을 비호하는 방패막이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고 이사장은 야당 이사진의 지적사항에 대해 “MBC가 민주적으로 방송 하도록 또 MBC경영진이 경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방문진 이사회가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한 실적을 정리해줘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 이사장은 야당 이사진의 ‘이사장 불신임’에 대해 “명예훼손 손해배상 1심 패소를 이유로 이사장직을 그만두라는 것이 말이 되냐”면서 “무죄추정의 원칙에 어긋나는 위헌적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비판 받았던 “우리법 연구회였던 담당판사”를 재차 거론하며 재판이 편향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연합뉴스)

고 이사장은 1심 판결문을 일일이 낭독하며 준비한 원고를 통해 하나하나 반박하는 식으로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이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믿을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데도 재판에서 이를 반영하지 않고 “판사가 판결문에 공공연히 피고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는 ‘문재인을 공산주의자로 볼 수 있는 근거’에 대해 약 45분가량 주장을 펼쳤다.

고 이사장의 변론이 끝나자, 여당추천 이인철 이사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이사는 야당 이사진이 올린 안건에 대해 “외부 정치세력의 공영방송 장악에 대한 일환”이라며 “방문진 이사들이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충성경쟁에 매달리는 것을 보기 안쓰럽다”고 비난했다.

이 이사는 고 이사장의 ‘문재인 공산주의자’ 발언에 대해 “주위 세평을 돌아볼 때 최근 (문재인에 대한)평가가 바뀐 것 같다”며 극우 성향의 인사가 ‘대한민국을 위한 고영주의 변론’이라는 제목으로 극우 매체에 게재한 글과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피고 측 재판증거로 제출한 의견서를 1시간 40분가량 낭독했다.

이 이사가 낭독한 글의 내용은 “노무현이 감정적 좌파라면 문재인은 이념적 좌파”, “문재인에겐 북한 독재자가 먼저” 등 맹목적인 비방과 색깔론이 주를 이뤘다. 낭독을 마친 이 이사는 “판결의 선결문제가 되는 것이 ‘공산주의자 발언’이었는데, (인용 낭독한 글을 통해)여러 가지 쟁점들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그럼에도 사퇴를 운운하는 것은 “MBC외부에서 방문진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려는 세력들의 정치적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 이사의 발언이 끝난 뒤, 여당 추천 권희철 이사는 “회의가 비효율적으로 흐르는 것 같다. 지금까지 일부 이사들이 보였던 여러 가지 행태가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며 기존에 야당 추천 이사진이 회의 때 논의를 길게 끈 것을 거론했다. 그는 “회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발언 시간제한을 했으면 좋겠다”며 “오늘은 더 이상 (고 이사장 거취를)논의 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나 생각한다”라고 말한 뒤, 회의장을 퇴장했다.

여당 추천 유의선 이사(이화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문재인 전 대표는 공인으로써 대통령이 될지 모르는 강력한 분”이라며 “나름대로 사상검증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밝혔다. 그는 “방문진 구성상 이념적 편향은 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민사상 1심 재판을 가지고 거취를 논한다는 것은 학자로서 봤을 때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야당 추천 이사들은 고 이사장과 여당 이사진의 발언 내용과 태도 등에 ‘방문진 사상 초유의 사태’라며 반발했다. 최강욱 이사는 여당 이사진에 대해 “아주 고생했다.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남의 얘기를 열심히 읽고, 발언시간을 제한하자고 하면서 퇴장했다”면서 “방문진 이사한지 4년이 넘었다. 오늘이 굉장히 중요한 날로 기억될 것 같다”고 말했다.

최 이사는 또 “방문진에서 오늘 벌어진 모습, 이사님들이 보인 모든 모습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 다행스럽다”며 “사회 각계각층의 다양한 입장을 반영해서 불편부당해야 할 방문진 이사진이 이렇게 행동해도 되냐”고 비판했다.

야당 이사진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여당 이사진은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고 이사장은 정족수 미달에 의한 회의 종결을 선언해, 파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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