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가장 압축적인 표현양식은 뭘까? 스트레이트 기사나 사설은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압축적 표현의 결정체다.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는 신문이라는 매체의 발달사와 궤를 같이한다. ‘사실’(만)을 가장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좀 더 정확하게는 독자와 사회가 그렇게 믿도록 신화화한 ‘특화된’ 형식이자, 신문 기사의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만평 또한 매우 압축적이다. 손바닥보다 좁은 지면 위에 당일의 핵심의제를 ‘촌철살인’한다. 다만 스트레이트 기사가 다분히 공학적 결과물이라면 만평은 작가의 직관과 창의력에 따라 결과가 판이해지는 창작물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스트레이트 기사나 만평보다 한 수 위의 표현양식이 있으니, 바로 ‘정정보도’다. 정정보도가 압축적인 것은 신문의 자기방어 기제가 극도로 고도화된 결과다. 신문이 이름이나 나이, 직함 등의 일부가 잘못 보도됐을 경우 즉각 바로잡는 것도 그나마 요즘 일이다. 이런 내용들이야 옥에 티 정도이니 크게 부담스러울 게 없을뿐더러, 오히려 실수를 바로잡는 데 적극적이라는 이미지 마케팅의 수단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사실관계가 틀렸을 때 신문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잘못을 지적하고 수정을 요구해도 웬만해선 들은 체도 않고, 언론중재위에 가서도 온갖 곡예를 다 부린다.

언론중재위에서 중재가 성립되더라도 그걸 문구로 만드는 과정은 마른 수건을 짜고 또 짜는 지난한 ‘공정’이다. 정정 보도문은 객관적으로도 짧지만, 정정을 요청하는 자에게는 어처구니없이 짧다. 원 기사에서 명백하게 잘못된 부분만 집자(集字)해 문장을 줄이고 줄이면, 마침내 표현은 정확하되 뜻은 실리지 않은 문장이 태어난다. 기사는 텍스트뿐 아니라 콘텍스트(맥락), 그리고 행간으로 구성되는 법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촛불’은 ‘파라핀을 고체로 굳히고, 가운데 심지를 박은 물질을 태워 밝힌 불’이 아니라 ‘민주주의’ ‘저항’의 의미를 띠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기사에는 있는 콘텍스트와 행간이 정정보도문에는 없다. 정정보도문이 바로잡는 건 일부 앙상한 ‘팩트’일 뿐, 그 문장에서 유기체적 물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언론 보도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한 두 문장의 정정보도문을 받아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인다. (물론 사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하려는 꼼수로 접근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언론에 대해 정정보도를 요구할 보편적 권리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보도가 정확하고 타당했더라도, 그것을 입증할 책임은 언론에게 있다.) 그들이 간신히 받아든 정정보도문은, 그러나 서지학이나 문헌학 수준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진실’을 복원할 수 없다. 신문 한귀퉁이에 실린 정정보도문은 곧장 망각의 창고 속에 처박히고, ‘거짓’은 여전히 무성생식하듯 유통된다. 기사와 정정보도문의 비대칭성은 해소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다.

지난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문화일보가 한날한시에 언론중재위원회에 섰다. 중재신청을 낸 이는 지율 스님이었다. 스님은 지난 4월 대법원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4년 24차례에 걸쳐 천성산 터널공사 현장에서 굴삭기 앞을 가로막고 농성을 벌인 데 대해 업무방해죄가 확정된 것이다. 법리적으로 명료한 판결이었다. 공사를 방해했으니 업무방해가 맞다. 지율 스님 주장의 진정성이나 타당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밥 먹으면 배부르다’ 수준의 판결을 두고 이들 신문은 스님을 ‘밥만 축내는 마녀’로 만들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대한민국 환경운동은 지금 국민 신뢰를 잃어 확연하게 쇠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환경운동의 내리막길은 천성산에서 시작됐다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 조선일보 4월 24일자 31면 사설.

그러나 지율 스님이 낸 중재신청 내용은 ‘팩트’ 부분을 넘어설 수 없었다. 이들 신문은 스님 재판 결과 기사에서, 스님의 농성으로 경부고속철도 공사가 1년 중단돼 2조원 손실을 입었다고 한 입으로 떠들었다. 조선일보는 “환경영향평가에서 자연습지들은 터널과 수직으로 300m 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결론났다”고도 덧붙였다. 이 모든 수치는 사업시행자인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의 일방적 주장이었다. 지율 스님은 공단의 공식자료만으로도 공사중단 기간은 6개월, 공사 손실액은 145억원이라는 분석 결과를 얻어냈다. 스님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수학실력이 낙제 수준이었던 나도 무엇이 진실인지 금세 알 수 있는 수준이다. 천성산에서는 공사 중 터널 붕괴 사고가 나고, 벌써부터 자연습지가 메말라가고 있다.

▲ 조선일보 6월5일자 2면 ‘바로잡습니다’

영혼이 없는 이들 신문에게 날수로 350일이 넘는 목숨 건 단식의 의미를 이해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인지 모른다. 하지만 자칭 언론이라는 이들 신문은 평생을 산문 안에서만 살다시피 한 비구니가 해낸 검증 작업조차 단 한 번 하지 않은 채, 공단 발표만 줄창 베껴 썼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수치이기에 검증의 필요성을 못 느꼈는지 모르겠으나, 정정보도를 피해갈 도리는 없었다. (동아일보는 중재안을 거부해 소송으로 넘어갔다.) 강제로라도 정정보도를 했으니 된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문화일보는 다른 보도에 대해 이미 똑같은 내용으로 정정보도를 한 바 있다. 조선일보 또한 이 수치를 두고 지율 스님에게 ‘10원 소송’이 걸려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신문들의 기사 검증 시스템이 이 정도일 수는 없다. 이들은 악의적인 상습 동일 전과자다.

이들 신문이 겁없이 상습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건 한 두 문장의 앙상한 정정보도가 이들의 뻔뻔함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지율 스님은 이들의 뻔뻔함에 맞서 문턱이 닳도록 언론중재위와 법원을 찾지만, 이들의 상습범죄는 시시포스(시지푸스)가 끝내 넘어설 수 없는 중력처럼 보인다. 이제 그 무거운 바위덩이를 그만 내려놓아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스님은 한숨을 폭 내쉬면서도 손사래를 친다. 이 엉터리 수치가 오로지 정치적 논리에 따라 고속철도 노선을 경주로 우회시키기 위해 천성산을 파괴한 행위에 면죄부를 주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생태/환경운동을 폄훼하는 무기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치는 언론에 400번 이상 보도됐고, 이 수치를 인용한 대기업 연구소 등의 논문도 100편이 넘는다. 정치권에서도 입만 열면 이 수치를 들이댄다.

지율 스님은 이를 ‘수=수학=과학’이라 믿는 ‘관성의 악령’이라고 부른다. 8일 정부는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 예산으로 모두 22조원을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6개월 사이에 60% 이상 비용이 늘었다. 5조8000억원에서 24조원까지 예산이 늘어난 경부고속철도 사업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경부고속철도 사업의 수익은 예상을 훨씬 밑돌고 있지만, 여전히 그럴싸한 수치로 분칠되고 있다. 4대강 살리기 사업 역시 ‘34만명 일자리와 40조원 생산유발효과’라는 장밋빛 수치로 꽃단장하고 있다. 이 사업으로 한반도 물길이 돌이킬 수 없도록 망가지든 말든, 뒷감당을 위해 얼마의 돈이 더 퍼부어지든, 사업을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율 스님에게 덧씌워진 수치의 낙인이 똑같이 되풀이될 것이다.

스님은 말한다. “천성산이 곧 한반도 대운하”라고. 자신에게 덧씌워진 수치의 낙인을 걷어내지 않으면 제2의 천성산, 제2의 한반도 대운하는 끝없이 되풀이될 거라고. 스님이 언론중재위와 법원에서 한사코 받아내려는 몇 문장의 정정보도는, 그래서 천성산 굴삭기 앞에 틀고 앉았던 아슬하지만 결연한 결가부좌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몇 문장의 정정보도가 감당하기에는 들어올릴 짐이 너무 무겁다. 지구를 들어올리려고 했던 아리키메데스의 지렛대에는 무한히 긴 장대와 받침대가 필요했다. 누군가는 더 긴 장대를 구해오든가, 아니면 짧은 장대라도 힘을 모아 함께 내리눌러야 한다. 서지학이나 문헌학 수준에 까마득히 못 미치더라도, <미디어스>는 앞으로 나올 정정보도들의 콘텍스트와 행간을 최대한 채워넣어야겠다. 한 번 해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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