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검은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중년남성이 검정 천에 붓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정성스럽게 써내려갔다. ‘Black List’. 글자를 적은 이는 임옥상미술연구소 임옥상 소장(서양화가)이다. 그는 글자가 적힌 천을 뒤집어 쓴 뒤 “나는 블랙리스트다. 그리고 나는 블랙리스트를 살아갈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규명 예술행동 및 기자회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임옥상미술연구소 임옥상 소장

임 소장은 이날 예술행동위원회가 기획한 “우리 모두가 블랙리스트 예술가다”란 주제의 예술 검열 반대 예술행동에 참가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블랙리스트)에 반대하는 의미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날 광화문 광장에서는 임 소장 이외에도 각 장르의 문화예술가의 예술행동이 동시 진행됐다.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규명 예술행동 및 기자회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김경수 씨(왼쪽)와 양혜경 씨(오른쪽)

춤꾼 양혜경 씨는 검정 깃발을 흩날리며 넋전 춤을 췄다. 양 씨는 “지금 대한민국에는 나쁜 기운이 많다. 탁한 기운을 풀어내고 싶은 마음에서 검정 깃발을 들고 춤을 췄다”며 “검정은 물을 의미하고, 물로 더러운 것들을 씻어낸다는 의미의 춤이었다”고 말했다.

춤꾼 김경수 씨는 풍물 소리에 맞춰 노란색 천을 들고 무용을 선보였다. 김 씨는 “노란색 천은 세월호를 의미한다. 노란색 천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에 대한 항의”라고 밝혔다. 서양화가 이하 씨는 박근혜 정권을 비판하는 풍자그림을 전시했다.

거리 예술 행동에 나선 이유

문화예술인들이 거리 예술행동에 나선 이유는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이 공개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회의록에서 문화예술위원장이 지원 심의 과정에서 ‘블랙리스트’ 존재를 암시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 이후 한 언론사의 보도를 통해 청와대가 지난해 문화예술계에서 검열해야 할 9,473명의 명단을 작성해 문화체육관광부에 내려 보냈다는 주장과 자료가 공개됐다.

지난해 5월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표지엔 지난해 5월 1일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서명한 문화인 594명, 2014년 6월‘세월호 시국선언’에 참여한 문학인 754명,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에 참여한 예술인 6,517명, 2014년 서울시장 선거 때 ‘박원순 후보 지지 선언’에 참여한 1,608명이 나타나 있었다.

그럼에도 13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조윤선 문화부장관은 “그런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받았다”고 일축했다. 이후 도종환 의원이 문예창작기금 지원 대상 작품을 심사한 심사위원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힘들다’고 토로한 녹음파일을 추가로 폭로하며 ‘블랙리스트’의 존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됐다.

이명박 정권보다 심하다

이날 예술행동에 참가한 문화예술가들 중 일부는 ‘블랙리스트’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양혜경 씨는 “92년부터 예술지원 예산을 받아왔다. 지원을 못 받더라도 2,3년 정도 건너뛰고 다시 받았었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더 이상 지원 예산이 안 들어왔다”고 밝혔다. 양 씨는 “이명박 정권 때보다 지금(박근혜 정권)이 더 심해졌다”면서 “예술 지원 항목자체가 없어졌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예산이 없어 알바한 돈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연극배우 김지영 씨는 “저 같은 경우, 극단 차원에서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와 선언문에 참가했다. 이후 극단 전체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며 “통신 검열 조회를 해봤는데, 경찰청에서 10차례 핸드폰 통화를 조회한 것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 정책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공연을 한 예술인들이나 극단들이 지원금을 못 받아 어려움에 처했다고도 말했다.

▲18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 진상규명 예술행동 및 기자회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미술가 이하 씨

서양화가 이하 씨는 “이런 막장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이명박 정권 때는 예술활동을 했다고 기소된 적은 없었다”며 “내가 기소된 건 전부 박근혜 정권 때”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은 민주주의를 철조망으로 둘러싼 것 같은 느낌”이라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심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개탄했다.

끝까지 싸우겠다

하지만 문화예술인들은 정부의 예술 검열·탄압이 더 심해진다고 해도 정부를 비판하는 예술 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지영 씨는 “이번 사태를 보고 연극인들 중 블랙리스트에 안 들어 간 이들은 ‘왜 난 안 들어갔냐’고 말한다. 또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에게 무료로 커피를 내려주겠다는 곳, 음향 후원을 하겠다는 곳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오히려 무서워하기보다 더 많은 작품과 공연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예술인들이 많다”고 강조했다.

임옥상 소장은 “나는 이미 블랙리스트로 살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된 마당에 어떻게 블랙리스트 상위권을 유지하며 살아갈 건지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 지원금 때문에 힘을 못 쓰고 있었다. 그 뒤로 작은 일에도 겁을 먹었다”면서 “이제는 당당하게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노순택 작가(사진가)는 “박근혜 정권이 예술가들의 이름을 수집해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면, 저희 사진가들은 정권이 벌인 어치구니 없는 짓들을 사진으로 수집하겠다”고 밝혔다.

▲예술행동위원회 및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정부의 예술검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뒤, 예술검열을 반대하는 의미로 낭독문을 하늘을 향해 던지는 모습

이날 행사를 주최한 예술행동위원회 앞으로 ▲‘예술 검열 사태’를 반대하는 글 언론 기고 ▲예술 검열 반대 만민공동회 조직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을 위한 ‘블랙어워드’ ▲문화행정파행을 공론화하는 포럼·토론회 등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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