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북한은 낯선 타자로 존재한다. 남한에서 북한은 ‘한민족’ 혹은 ‘간첩’이라는 극단적 이분법으로 드러난다. 나아가 북한에 대한 이러한 재현은 남한뿐만 아니라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에서 익숙한 것이 되었다.

이때 매스미디어는 가장 적극적으로 북한의 이미지를 생산하기를 자처한다. 북한의 가장 적대국가인 미국에서 북한은 ‘위험한 핵보유국’이거나 ‘우스꽝스러운 풍자의 대상’으로 뉴스와 코미디쇼에 등장한다. 이러한 재현이 어떻게 가능해졌을까. 세계 유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자본주의라는 기울어진 구도에서 북한은 패권국가 미국에 맞선 영웅, 또는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로 거듭난다.

그렇다면 미디어가 재현하는 북한의 모습을 재생산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이분법적 재현을 넘어서는 인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메뉴 선택 고심하는 북한 소녀

양영희 감독의 <굿바이 평양>(2009)은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나름의 힌트를 제시한다. 재일 조선인인 그녀는 세 명의 오빠들을 북한으로 떠나보낸 뒤, 북한에서 진행되어 온 10여 년간의 그들의 삶을 기록해왔다. 전작인 <디어 평양>(2006)이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신념을 갖고 평양으로 아들들을 떠나보낸 아버지를 다루는 것이었다면, <굿바이 평양>은 떠나간 오빠들과 그 가족들의 삶을 비춘다.

앙영희 감독의 카메라는 오빠들과 조카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줌으로써 북한에 대한 이분법적 재현을 넘어서려 시도한다. 이는 북한을 이야기하는 영화들 중 최근에 만들어진 것, 예를 들면 우크라이나 출신 감독이 만든 <태양아래>(2015)나 영국 출신 감독이 만든 <연인과 독재자>(2016)조차도 북한에서 살아가는 민중을 늘 독재자라는 존재와 연결해 재현하는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굿바이 평양>은 북한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한 인물의 짧은 여정을 약 17년간 지켜보며 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굿바이 평양>은 일상적 순간들을 감독의 조카, 양선화라는 인물을 통해 주되게 보여준다. 그녀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 위치해 있고, 영화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맡는다. 영화의 서두에서 불과 세 살이던 그녀는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스무 살의 대학생이 되어 오사카에 살고 있는 고모(감독)에게 편지를 보낸다.

<굿바이 평양>의 또 다른 미덕은 영화 속에서 누구도 정형화되지 않으며, 쉽게 예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과 양선화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언제나 우연성과 가능성을 담보로 형성된다. 이를테면 처음 가는 한 식당에서 새로운 메뉴를 골라야 하는 양선화와 그런 그녀를 기다려주는 고모와의 관계가 보여주는 우애의 순간처럼 말이다.

선화는 고모 양영희 감독이 데려간 레스토랑의 함박스테이크, 떡볶이 등 낯선 이름의 음식들이 적힌 메뉴를 보고, 내내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다. 하나를 골랐을 때, 혹시나 다른 게 더 맛있다면 어쩌나 싶었기 때문이다. “고모가 알아서 주문해 달라”고 말하는 선화에게 고모는 “안 보고 후회하는 것보다 봐놓고 후회하는 게 낫지 않아?”라고 말하며 조카를 설득하고 선택하길 기다린다.

이 장면은 관객인 우리 역시 ‘자신이 먹을 메뉴를 선택하기 위해 고심하는 북한 소녀’의 모습에 대해 한 번도 사유한 적 없었음을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선화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메뉴를 고르고 선택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지 모른다.

개인적인 것을 사회적으로

북한을 둘러싼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조건들이 쉽게 바뀌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이미지는 어떻게 북한을 재현할 수 있을까. 양영희 감독의 <굿바이 평양>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재현한 북한의 일상의 이미지를 통해 저마다의 힌트를 얻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영화는 재일조선인이자 고모인 양영희 감독 개인이 갖고 있는 삶의 경험, 일종의 홈비디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결코 개인적이지 않다.

불행히도 현실에서는 이러한 재현조차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작동한다. 영화 속에서 전작 <디어 평양>이 남한에서 개봉할 것이라는 이유로 북한 입국금지령이 떨어졌다는 양영희 감독의 내레이션은 북한에 대한 이분법적이지 않은 이미지 재현이 북한과 ‘개인’ 양영희의 상호관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또 다시 차가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북한이라는 낯선 타자를 어떻게 응시해나갈 것인가. 미디어가 제공한 틀은 여전히 한계적이다. 그 강고한 힘의 관계에서 북한에 대한 고민의 끈을 부여잡기란 현재로서는 아득해 보일 뿐이다. 평양과 오사카를 오가는 홈비디오에서 출발해 복잡한 정치사회적 고민을 담고 있는 <굿바이 평양>의 시선이 그 힌트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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