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논란이 상식적인 관점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한 나라의 정치와 외교정책이 동네 반상회 말싸움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참여정부에서 벌어졌던 10년 전의 일을 박근혜 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니 필연적으로 생기는 일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했던가.

새누리당의 주장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참여정부가 2007년 11월 유엔 대북 인권결의안 표결에 기권한 이유는 북한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서 이를 관철시킨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대통령직을 수행할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이다.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좌측)가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을 들어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에 등장하는 장면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주장이 엇갈린다. 당시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및 10·4 선언 이후 국면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수준에서 북한과의 소통이 가능한 시기였던 걸로 보인다. 유엔의 북한 인권결의안에 대한 투표 문제도 기권과 찬성으로 입장이 나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이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대해 관료들마다 기억이 다르고 해석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송민순 전 장관의 주장은 찬성이냐 기권이냐를 대통령에게 결정하도록 하자고 건의했으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전 대표가 다수 의견대로 기권으로 합의해서 건의하자고 했고, 이후 과정에서 자신이 기권 표결에 동의하지 않자 문재인 전 대표가 회의를 주재해 북한에 이에 대한 의견을 묻고 최종 결정을 내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다른 관련자들은 당시 상황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설명한다. 기권 표결은 이미 대통령 수준에서 결정이 된 일이었으나 송민순 전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쓰며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자 그를 제압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고, ‘북한의 의견을 듣자’는 제안은 기권 표결 결정을 통보하고 이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자는 수준에 불과했다는 거다.

일련의 논란에는 여러 겹의 문제가 겹쳐져 있다. 첫째는 참여정부 특유의 자유주의적 관료정치다. 17일 SBS라디오에 등장한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는 당시 상황을 “관료정치(bureaucratic politics)의 한 전형”으로 해설하면서 통일부와 외교통상부가 정책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로 설명했다. 즉, 통일부와 외교통상부 중 대통령이 통일부의 손을 들어준 문제로 봐야 한다는 거다. 각 부처 간의 정책적 이견이 토론을 통한 합의로 결정되는 체제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날 수밖에 없다. 국무위원들은 그저 ‘말씀’을 받아 적기 바쁘고 대통령의 ‘레이저’ 한 방에 장관의 목이 달아나는 박근혜 정권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다.

둘째는 송민순 전 장관이 회고록을 출간한 의도에 관한 문제이다. 일각에서는 송민순 전 장관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가깝고 그의 대권 도전을 돕기로 했다는 점에서 일부러 문재인 전 대표를 불리하게 만들기 위해 책에 이런 내용을 넣은 것 아니냐는 추측을 제기하고 있다. 17일 MBC라디오 <신동호의 시선집중>에 출연한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송민순 전 장관 회고록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긍정적 표현이 다수 등장한다며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내신 분이 이렇게 격렬한 사실논쟁, 진실논쟁이 예견돼 있는 것들을 썼다는 것은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셋째는 현 정권과 새누리당의 ‘종북몰이’의 차원이다. 송민순 전 장관 회고록의 핵심은 현 보수정권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이런 맥락은 무시하고 오로지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와 관련된 부분만을 들춰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민순 전 장관 회고록의 해당 부분은 문재인 전 대표가 상대적으로 부각돼 있긴 하지만 새누리당이 주장하는 ‘문재인 북한 내통설’과는 별 관계가 없는 내용이다. 정작 회고록에서 ‘북한의 의견을 물어보자’고 한 사람은 새누리당에 공천을 신청하기 위해 입당한 전력도 있는 김만복 국정원장이며, 북한의 의견을 묻기 전에도 이미 관련 인사들의 입장은 찬성이냐 기권이냐로 양분돼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8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당시 문재인 비서실장과 송민순 외교통상부 장관이 대화하며 입장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런 맥락을 보면 새누리당이 하려는 일은 결국 문재인 전 대표를 ‘종북’으로 모는 전형적인 색깔론에 의한 공격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송민순 전 장관이 본의든 아니든 흘려 놓은 기름에 불을 붙이고 부채질까지 하고 있는 양상인 셈이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르·K스포츠재단과 최순실 씨 모녀 문제를 신문 지상에서 밀어내면서 동시에 야권의 최대 지지를 받고 있는 문재인 전 대표에 상처를 내려는 걸로 해석할 수 있다. 보수세력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여전히 ‘레드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한국 사회의 사회적 기반이 존속하는 한 이들의 이런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이 행보가 특별히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징후도 있다. 17일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이재명 기자의 칼럼을 보면 그렇다. 이번 대선에 박근혜 대통령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이는 주로 북한과 관련한 문제를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거다. 동아일보는 새누리당 관계자의 말을 빌어 ‘미국이 북한에 대한 타격 계획을 언제든 실행할 수 있는 상태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만이 남았는데 실행에 옮겨질 가능성도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전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전쟁날 수 있다’는 얘기다.

동아일보 17일자 지면에 실린 칼럼

실제로 이런 이야기는 최근 여의도 정가에서 마치 ‘풍문’처럼 이런 저런 형태로 거론된 바 있다. 특히 미국이 ‘선제타격론’을 노골적으로 지시하는 수준까지 대북압박 수위를 올리면서 이런 종류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동아일보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정권재창출 등 국내정치와는 담을 쌓은 듯 행동하고 있는 것도 이런 추측에 힘을 싣는 근거라고 주장했다. 상황을 뒤집을 ‘한 방’을 계획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거다. 만일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대선 판이 짜여진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내통자’ 문재인 전 대표 보다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

워낙 상상한 것 그 이상을 보여주는 정권이니 앞으로의 일을 전망하기도 어렵다. 분명한 것은 이번 일로 인해 야권의 대권주자가 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또다시 드러났다는 거다. 문재인 전 대표와 제1야당이 그동안 취해온 전략은 시선을 ‘경제’로 돌리게 해 고질적인 ‘색깔론’을 피해가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재인 전 대표가 ‘유능한 경제 안보 정당’을 주장해온 것도 이의 일환이다.

그러나 아주 조그마한 빌미를 갖고도 ‘종북’을 만들어 내고, 이걸로 대중적 차원에서 ‘장사’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 새누리당의 의도는 어설픈 ‘중도화’로는 사실상 돌파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같은 얘기도 문재인이 하면 ‘종북’이 되고 반기문이 하면 ‘평화’가 되는 딜레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이슈를 지속적으로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조건을 만드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거다. 전쟁의 결단을 꼭 내리지 않더라도 어쨌든 이 정권은 대선까지 대북문제를 소재로 해서 국면을 관리할 태세다. 이런 시도에 ‘평화’를 내세우며 정면으로 맞설 것인지, 이를 뒤덮을 또 다른 바람을 만들어 낼 것인지는 전략적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처럼 적당히 웅크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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