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자주 신작을 낸다고 해도 최소 2년은 기다려야하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해안가로의 여행>,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사건>(이하 <크리피>), 올해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공개된 <은판 위의 여인>까지 근 1년 동안 구로사와 기요시는 연속으로 세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해안가로의 여행>은 지난해 열린 68회 칸영화제에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감독상을 수상했고, <크리피>는 올해 열린 6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에서 상영되었다. 이번 BIFF에서 상영된 <은판 위의 여인>은 기요시가 일본이 아닌 해외(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작업한 첫 영화이다.

영화 <은판 위의 여인> 스틸컷

기요시의 전작 <해안가로의 여행> 또한 프랑스 자본이 투입된 일본-프랑스 합작 영화이다. 그런데 <은판 위의 여인>은 프랑스에서 올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고, 출연 배우 모두 프랑스인이다. 당연히 영화에서 사용되는 언어 또한 프랑스어이다. 일본 호러 거장이 만든 프랑스 영화, 참으로 낯설고도 독특하다.

<은판 위의 여인>이라는 제목에서 암시되듯, 여주인공 마리(콘스탄스 루소 분)는 은판 위에서 포즈를 잡는 모델이다. 정식 모델은 아니지만 실물 크기의 은판으로 인물 초상을 찍는 19세기 촬영방식인 ‘다게로타입’을 고집하는 아버지 스테판(올리비에 구르메 분) 때문에 억지로 아버지를 위한 모델로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은판 위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셔터만 누르면 바로 찍히는 보통의 사진기들과 달리, ‘다게로타입’은 인물 구도를 잡고 사진이 찍히기까지 무려 몇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하기에, 은판 위에서 꼼짝없이 같은 자세를 유지해야한다. 사진이 완성될 때까지 절대 몸을 움직여서는 안 되기에, 그 모습은 흡사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것 같다.

영화 <은판 위의 여인> 스틸컷

오랜 시간 아버지를 위해 ‘은판 위의 모델’이 되어온 마리는 굉장히 지친 상태였고, 스테판의 새로운 조수로 고용된 장(타하르 라임 분)과 함께 아버지 곁을 떠나고자 한다. 그러나 사진에 미친 스테판이 마리를 놓아줄 리 만무하다. 그리고 스테판이 파리 근교에 위치한 대저택을 떠날 수 없는 비밀이 밝혀지며, 영화는 기요시 감독의 장기인 호러 분위기로 치닫게 된다.

인간과 공존하는 유령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에 있어서, <은판 위의 여인>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올해 열린 마리끌레르 영화제, 무주산골영화제를 통해 국내 관객들과 만났던 <해안가로의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해안가로의 여행>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기요시의 영화에는 유령이 등장한다.

영화 <은판 위의 여인> 스틸컷

기요시가 유독 ‘유령’에 집착하는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해안가로의 여행>에서도 그랬듯이, 유령이 떠돌아다니는 <은판 위의 여인>은 무섭고 잔인하다는 느낌보다 신비하고도 슬픈 분위기가 앞선다. 최근 기요시 영화에 등장하는 유령들은 살아있는 인간들처럼 형체도 있고 체온도 느껴진다. 언젠가는 그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그건 숨이 붙어있는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전통방식을 추구하는 고집스러운 예술가의 고뇌 외에, <은판 위의 여인>은 아버지의 작업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식간의 대립이 더해지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기요시의 대부분 호러 영화가 그렇듯이, <은판 위의 여인> 또한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예정된 수순이지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집착이 만든 환상의 끝은 아름답지만 허무하다. 내려놓음을 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하나, 미련과 아쉬움이 만든 기요시의 유령이 계속 눈에 아른거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 듯하다. 국내 수입이 결정되어 곧 정식 개봉작으로 만날 수 있는, 기요시의 야심작이다.

연예계와 대중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보고자합니다. 너돌양의 세상전망대 http://neodol.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