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13년이다. 처음 인권영화제와 연을 맺은 건, 어색하고 어설프기 그지없었던 ‘대학생 기자’였을 때다. 개인사적으론 잊혀 지지 않는 사건이자 경험이다. 강한 ‘저널리즘’에 대한 동경에 고민할 것도 없이 무작정 대학신문사 면접을 봤고, 그렇게 1학년 ‘수습’ 딱지를 붙이고 배정받는 첫 번째 아이템이 바로 ‘제2회 인권영화제’였다. 기사를 쓰느라 밤을 새고, 선배들의 빨간펜 아래서 수없이 고치고 고쳤다. 드디어 신문이 발행되고, ‘김형진 기자’라는 이름이 적힌 첫 번째 기사를 봤을 때의 환희란, 이루 말로는 다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어젯밤 다시 학보사 축쇄판을 뒤적거리며 찾아 본 기사는 턱없이 부족하고, 어색한 문장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기가 민망했다.

그래서 인권영화제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애착이 간다. 비단 나의 ‘첫’ 기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인권영화제를 둘러싼 상황은 어리버리한 초짜 수습기자, 그것도 대학신문사의 기자였던 내게는 꽤나 묵직한 주제였고, 큰 상처였다.

불심검문, 체포, 구속 … 표현의 자유를 얽매던 13년 전

▲ 제2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 인권영화제 홈페이지
예정대로라면 1997년 9월 27일 개막하고 10월 4일일 폐막해야 했지만 제2회 인권영화제는 폐막을 하루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영화제 장소였던 홍익대학교 측은 상영장소 전원 차단, 화장실․자판기 사용금지 등의 조치로 관람객에게 불편을 주었다. 경찰은 홍익대 주변의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그 기간 학교를 불시에 침탈하여 당시 총학생회장 권한대행이었던 수배자를 연행해갔다. 홍익대의 시설 보호 의뢰와 당시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서준식씨의 고소를 이유로 영화제 개최 자체를 ‘탄압’했던 경찰이었다. 결국 명동성당으로 장소를 옮겨 연장상영에 들어갔지만 경찰의 불심검문은 이어졌고, 결국 그해 11월 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이자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서준식씨는 체포 구속되었다.

문제는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사전심의였다. 인권영화제 상영작들이 공윤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 경찰은 인권영화제 자체를 흔들었고, 막아 나섰다. 표현의 자유 실현의 가치를 영화제의 주요한 메시지로 전달하려 했던 인권영화제는 당시 어떠한 검열과도 결연히 맞섰었다. 화제작이었던 <레드헌트>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심의’를 받지 않는 영화제는 존재 자체로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96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영화에 관련한 공윤의 사전심의제도는 헌법에 명시된 언론출판의 자유를 침해한 검열 장치라고 규정된, 위헌 판결이 내려진 이후였다. 완전히 정치적인 ‘검열’이었다.

아마도 제목에서 풍기는 ‘레드’라는 단어에 식겁했기에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밀듯이 표현이 터질 것을 우려한 조급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찰을 앞장세운 정부는 영화제를 무산시키려고 안간힘을 썼고, 상영장의 전원을 차단하는 등 갖은 유치한 방법을 동원하였다. 결국 서준식 대표와 <레드헌트>의 감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2003년 대법원은 <레드헌트>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랬다.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검열’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12년 전에도 인권영화제는 ‘가치’와 ‘상식’의 편이었다. 그렇게 12년 전에도 인권영화제는 불합리한 것들에 저항하였다. 어설프기만 하였던 대학 ‘수습’ 기자의 눈에 인권영화제는 ‘상식’의 상징이었고,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끔찍이 자유로운 행위였다. 그래서다. 개인사를 쓴다면 ‘인권영화제’는 의미 있는 키워드고, 사건이었다.

온전하지 못한 시대, 나태한 시간

숱한 시간이 흐르고, 문화운동을 업으로 살면서 인권영화제는 이제 나에게 한 해, 한 해 지나는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머리가 굵어진 탓도 있지만, 넘쳐나는 현장의 부조리가 버거웠을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 06년 평택 주민들이 ‘올해도 농사짓자’며,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대추리와 도두리로 인권영화제가 찾아갔을 때도 삼엄한 경찰의 검문을 뚫고 대추리로 들어가는 일이 아마도 귀찮아 발길을 향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1년 사전검열제가 폐지된 이후부터 인권영화제는 대학 강의실이 아니라 ‘극장’에서 판을 벌였다. 명실공히 굵직한 ‘영화제’로 평가받았고, 관람객들은 좀더 편안하게 ‘인권’과 조우했다. 시위대를 향한 최루탄도 사라진지 언 10년이 훌쩍 넘어버렸는데, 인권영화제 역시 이제는 조금이나마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태함의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표현의 자유가 온전히 허락하지 않는 시간이었는데도 말이다. 망각처럼.

다시 거리를 선택하다

▲ 다시 거리로 나온 제12회 인권영화제 ⓒ 인권영화제 홈페이지
결국 인권영화제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지난 해 12회 인권영화제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진행되었다.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영비법)에 부딪혔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는 상영등급 분류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 12세, 15세, 18세 혹은 전체관람가 등. 인권영화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인권영화제는 ‘무료’상영을 고집하고 있다. 허나 영비법은 누구든지 상영등급을 분류 받지 않은 영화를 상영하여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영화진흥위원회의 ‘심의면제’ 추천을 받지 않고서는 영화관에서 상영할 수 없다. 결국 인권영화제는 거리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현행 영비법에 막혀 거리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만의 심의를 심의한다’며 대안적 심의 제도를 모색하고자 거리로 나와 자율적인 공개심의절차를 거쳐, 그렇게 마로니에 공원에서 12회 인권영화제를 진행하였다.

분명 대놓고 가위를 들이미는 무자비한 방식은 아니다. 선명하게 눈에 드러나는 분서갱유의 형태도 아니다. 허나 여전히 ‘등급을 받지 않을 권리’는 시대유감으로 남아 있다.

차벽, 불허, 방해 … 표현의 자유를 옭아매는 지금

▲ 13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 인권영화제 홈페이지
2009년 인권영화제의 선택은 ‘청계광장’이었다. 촛불의 상징, 민주주의의 장이었던 ‘청계광장’에서 죽어가고 있는 표현의 자유를 되찾고자 하였다. 허나 서울광장은 물론 청계광장은 전경 차벽으로 둘러싸였고, 소통과 표현의 장이어야 하는 공간이 공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가로막혔다. 행사를 코앞에 두고 전경버스는 청계광장에 숨통을 조이고 있었고, 결국 서울시는 ‘시국정국’ 운운하며 영화제 불허 통보를 내렸다. 행사 시작 이틀 전의 일이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 자리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권력에 의해 가로막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인권영화제는 ‘강행’을 선택하였지만, 서울시는 인권영화제가 ‘합의’한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며 떠들어댔다. 그리고 몇 시간 되지 않아, 서울시는 “청계천 인권영화제에 대하여 주변여건변화 등으로 행사진행을 승인하오니 기제출한 행사계획 및 허가조건에 맞게 행사를 진행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환영할 수밖에 없는 결과다. 하지만 인권영화제 개막 당일 새벽, 무대를 쌓고 분주히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경찰이 청계광장으로 전경버스를 들이밀었다. 통보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주저리주저리 떠들 뿐인 정말 꽉 막힌 경찰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청객이었다. 결국 2시간 가까이 방해를 하던 경찰들은 퇴장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13회 인권영화제는 개막하였다. 소라탑 앞 전경버스를 두고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촛불의 상징인 청계광장에서 영화제를 평화로이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겹다. 하지만 썩 반갑지가 않다. 13년, ‘나’라는 개인에게 무거운 숙제를 던졌던 인권영화제의 조건과 상황이 닮아도 너무 닮아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불편하다. 13년 전 <레드헌트> 상영을 기어이 막고자 했던 경찰은 변하지 않았다. 전경버스로 발 디딜 틈 없이 광장을 막아놓고, 그들에게 불리한 소리만 들리면 가차 없이 연행하는 경찰의 시계는 멈춰있다. 전경 버스 뒤에서 상영되는 인권영화가 난센스 그 자체다. 그래서 인권영화제는 ‘험한 세상의 다리’가 아니라 ‘험한 세상의 분노’가 되어야만 한다.

13년 전, 당시 인권영화제 서준식 집행위원장은 인권하루소식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인권영화제는 어떤 장소에서 어떤 형태이던 예정대로 치러질 것입니다."(인권하루소식 제969호) 꽤나 긴 시간의 그 한마디가 여전히도 유효한 현실이 어리버리 초짜 기자의 명함을 떼어버린 지금, 그 때의 상처를 들춘다. 그 때의 분노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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