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기타를 배웁니다. 손끝이 아려오는 아픔을 딛고 소리를 질서있게 배열해내는 수준에 도달하는 사람은 적지만, 그래도 누구나 한 번쯤은 기타를 배웁니다. 기타를 만드는 사람, 왠지 덥수룩한 구레나룻 수염에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고 있을 법한 그 사람들도 알고보니 평범한 노동자였습니다. ‘기타’를 둘러싼 꿈과 현실의 바툰 경계에서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은 500일 넘는 장기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기타 만드는 공장 콜드/콜텍의 노동자들 이야기입니다. 물론, 콜드/콜텍의 장기투쟁은 기타에 관한 우리 모두의 꿈처럼 낭만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국경을 넘는 자본의 일방적 질주라고 하는 엄혹한 현실의 문제입니다. 앞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오래되었지만 잘 알지 못하는 그 투쟁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누군가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했는데, 꿈과 현실이 기타의 한 조각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릴레이 기고는 기타에 관한 꿈 한자락씩을 공유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합니다.

▲ ⓒ노순택
아이가 하나 있다. 요즘엔 잘 만나지 못한다. 초등학교 5학년이라고 한다. 언제 그렇게 컸는지 대견하다. 내가, 키워준 것은 전혀 없다. 난 늘 밖으로만 돌았다. 아내와 할머니가 거의 키웠다. 그래도 아이는 나를 좋아한다.

작년에는 법정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돈을 받고 일하다 쫓겨난 기륭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살았다. 올해는 용산에서 안타깝게 죽어간 열사 유가족들, 철거민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래 그렇게 말하자. 너무 힘들다. 몇 번이고 이제 그만 도망치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두 번 씩이나 고공철탑농성을 하고, 건물옥상을 점거하고 94일을 단식하던 기륭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용역깡패와 경찰들, 그 뒤에 도사린 건설자본들에게 쫓겨 가파른 망루에 올라야만 했던 용산 철거민들처럼 나도 갈 곳이 없었다.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어딜 가도 자본주의 사회의 룰은 똑같았다. 어딜 가나 여전히 사람들은 착하고, 열심이었지만 자본의 울타리를 벗어날 순 없었다.

그렇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하루 하루가 깎아지른 벼랑처럼 가파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연과 음악과 책과 맛있는 음식과 여유와 풍요가 있는 곳에서 한가롭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고 싶다. 아름다운 꿈만 꾸고 싶다. 더 이상 분쟁이 없는 곳, 착취가 없는 곳, 이별이 없는 곳, 오해가 없는 곳, 슬픔이 없는 곳에서 가을날 곱게 붉게 물들어 가는 낙엽 한 닢처럼 후회없고 싶다.

하지만 이 사회는 우리에게 그런 여유를 주지 않는다. 누구라도 밟고 올라서야 하는 성적순의 사회, 아귀다툼 경쟁의 사회. 한시라도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노동 사회. 미래가 없는 사회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내게도 아이가 하나 있다. 아름다운 아이가. 가끔 잠자는 모습을 보면 해맑다, 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을까를 알 것 같은. 그 아이에게 나는 무엇도 해준 것이 없지만, 그 아이는 저의 삶을 잘 찾아가는 듯해 다행이다. 그 중 가장 다행인 것은 아이가 악기를 하나 다룰 줄 안다는 것이다. 얼마전 얘길 들어보니 체르니 40에 들어갔다고 한다. 난 사실 체르니 40이 어떤 단계인지 전혀 모른다. 모르면서도 벅차다. 아이가 제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악기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꿈 중 꼭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었다면 내 마음을 실을 수 있는 악기 하나를 가져볼 수 있다면 하는 것이다. 외로울 때, 쓸쓸할 때, 기쁠 때, 무엇보다 말로 잘 표현을 못하겠을 때, 글로도 못 쓰겠을 때 내 마음의 결을 악기에 실어 노래할 수 있다면 하는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피리 하나 불 줄 모른다. 건반에 ‘도’ 자리가 어디인 줄을 지금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악기 앞에 서거나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것은 어릴적 십여년을 쫓아 다녔던 짝사랑 소녀 근처를 다가가지 못했던 아쉬움만큼이나 큰 세계에 대한 상실감이었다.

난 그렇게 조율된 노래와 선율이 없는 곳에서 어린 날을 위악스런 아이로, 젊은 날을 노동자로 보냈다. 고향 5일 장터는 늘 악다구니 싸움판이었고, 옷가방 하나 들쳐메고 쫓아다녔던 노동현장은 기계소리 밖에 없는 곳이었다. 나는 마치 산소가 부족한 물고기처럼, 물 없는 사막의 나무처럼 늘 최소 생존에 쫓겨 다녀야 했다. 그런 내게 악기 하나는 단순한 기호물품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삶이었다. 내가 왜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삶이었다.

나이가 들며 주변 사람들 역시 조금씩 경우들은 다르지만 나와 같은 소외감을 느끼며 살아 간다는 것을 알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생산한 물품으로부터 소외를 느끼고, 자신이 일하는 일터에서 소외를 느끼고, 차별이 만연한 사회관계 속에서 소외를 느끼고, 역사의 격랑 속에서 소외를 느끼고, 분배의 과정에서 소외를 느끼며 아프게 살아가고 있었다. 난 이런 공동체의 운명 속에서 또 다른 소외를 경험하곤 했다. 나의 소외가 아니지만 소외가 만연한, 외로운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아귀다툼이, 처절한 절규들이 덩달아 나를 슬프게 하곤 했다.

나의 선택은 이런 소외를 없애는 일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소외를 조장하는 사회구조를 폭로하고, 그 철벽에 저항하는 일이었다. 누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해방을 위한 일이었다. 끊임없이 개인화되는 내 안에서 역사의 실낱을 찾고,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연대 관계망에서 내가 끊어진 한 줄의 실이 되지 않도록 간절히 붙들고 늘어지는 일이었다.

▲ ⓒ콜트콜텍 문화행동 블로그 (cortaction.tistory.com)
우연히, 콜트 콜텍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500일 가까이 공장폐쇄에 맞서 싸워 온 사람들이었다. 콜트 콜텍 박영호 회장은 수십년 부려먹던 사람들을 좀더 값싼 노동력들로 대체했다. 인도네시아와 중국의 가여운 민중들이었다.

처음 만난 그들은 미안하지만 그들이 생산해 온 상품에 대해서는 별 애틋함이 없었다. 기타는 단지 생존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기타가 아닌 무슨 공업용 물품이었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생존을 영위하기 위한 약간의 돈이 필요했고, 무엇을 만들든 몸을 팔 수 있는 일터가 필요했다. 기타는 자신들의 노동력과 지문과 손가락과 폐활량을 뺏어가는 작업 물량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쩌면 꼴도 보기 싫은 착취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그 기타가 팔려나가 무슨 사랑 노래를 부르든, 어떤 생명의 노래, 연대의 노래, 기쁨의 노래를 연주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가족들의 생존이 겨웠을 뿐이다. 문화라고, 그것은 배부른 베짱이들이나 소수 유한계층의 호사로운 놀음일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나와 처지가 같은 이들이었다. 살아가는 일이 행복이며 창조가 아니라, 노역이며, 고역이며, 모욕인 사회에서 안간힘으로 버티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이에겐 또 다른 생명일 수 있는 아름다운 악기를 만들어주면서도, 사랑을 위한 메신저, 화해를 위한 가교, 명상을 위한 터미널을 만들어주면서도, 그런 세계 기타의 1/3을 만들면서도 최소 생존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사람들이었다.

난 그들이 일터를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일터는 착취를 위한 동물우리이기 십상이었다. 난 그들이 빼앗긴 임금을 돌려받기만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바친 노동과 받은 모욕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기타를 돌려받기를 원한다. 기타는 나무만이 아니다. 쇠줄만이 아니다. 니스나 아교만이 아니다. 자개문양만이 아니다. 그 기타는 그 기타를 만든 노동자들의 몸의 일부다. 연장된 생명의 일부다. 살아 있는 호흡이며 근육이며 핏줄이며 뼈다. 기타와 기타를 만든 노동자와 그 기타로 노래부르는 사람들의 삶과 생명은 떨어져 있지 않다. 한 몸으로 살아가는 확장된 역사적, 사회적 생명체다. 난 그들에게 그들 모두가 돌려지기를 원한다. 피 한 방울, 호흡 하나, 근육 한 줄, 뼈조각 하나 빼앗기지 않고 모두 돌려받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쓰는 작은 물건 하나 하나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그 모든 것들이 어울려 행복만으로 충만한 사회를 그려 본다.

인천 부평IC를 막 나가면, 대전 계룡IC를 막 나가면 폐허가 된 공장 둘이 있다. 쫓겨난 노동자들이 삯바느질을 하면서, 통나무를 태우며 세월을 버티고 있는 공장 둘이 있다. 한때 이곳은 창문 하나 없이 밀폐된 공장이었지만, 모두가 먼지와 유기용제에 질식당하는 사육의 공장이었지만, 세계의 모든 노래를 담을, 세계의 모든 사랑노래를 담을 아름다운 악기를 만드는 꿈의 공장이었다. 여기서 알바네즈, 휀다 등 세계적인 기타들이 만들어졌다. 말을 잘 못하는 언청이 노동자가, 말하기 전에 얼굴부터 붉어지는 수줍은 노동자가, 배운 거라곤 차별받는 것밖에 없는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그 기타들을 만들어 주었다. 30여년동안 기타와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과 그 기타로 노래부르는 사람들의 삶과 노동을 착취해 홀로 1천억대의 부자된 박영호 회장이 만들어 준 게 아니었다.

나는 나의 아이가 이런 노동자들의 아픈 이야기를 기억하지 않으면서, 어떤 죄책감이나 부채감 없이 그냥 아름다운 피아노 건반을 통통 두드리면서 아름다운 것들만을 위해 노래할 수 있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삶과 노동이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 기타와 피아노와 하프와 아코디언과 괭과리와 풀피리와 바람과 햇볕과 강물이 모두 어우러져 생명의 존엄과 사랑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그 날, 그 날을 맞고 싶다. 이기적이어도 누가 되지 않는 세상, 부족해도 놀림당하지 않는 세상, 바보인 사람들이 사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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