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진도 5가 넘는 지진이 일어났고, 수백차례의 여진이 뒤따랐다. 경주 지진 전에 우연히 관측된 인근 울산 태화강 숭어떼 이동과 부산 광안리의 개미떼를 두고 뒤늦게 지진의 전조현상이라는 등 갖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자연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앞두고 나타나는 전조현상은 사회의 변화를 설명할 때도 등장한다. 조선 말기 상황을 살펴보면, 세도정치로 권력이 사유화되고,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생 피폐해지며, 민란이 발생하고, 동학이나 개혁파들의 자구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일련의 흐름이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런 말기적 현상들이 조선 멸망의 전조현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내년이면 '6월 민주항쟁' 30주년이다. 그 때도 전조현상이 있었다. '6월 항쟁'이 종식시킨 권위주의체제는 기실 유신체제를 억지로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길게보면 유신 말기에 발생한 부마항쟁, 박대통령 암살 등도 권위주의 체제 종식의 전조현상으로 볼 수 있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은 처음부터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말기에 이르러 부천 성고문사건이 벌어졌고, 87년 초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지면서 몰락했다.

사건 자체가 비극적이고 우리사회에 큰 충격을 줄만한 것이지만 더 주목할 부분은 사건이 발생하고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이 체제 반대진영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체제 내부자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유신을 무너뜨린 박대통령의 암살은 체제의 일부였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결행했다. 박종철군의 주검을 검안하고 고문치사가능성을 밝힌 오연상 의사나 관련자들의 엄격한 수사를 지시한 최환 공안부장이 진보적이거나 민주화운동에 동조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그들은 의사와 검사라는 전문가로서의 직업윤리에 충실했을 뿐이다.

일 오후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연구혁신센터에서 열린 고 백남기 씨의 사망진단서 논란에 대한 서울대병원-서울대 의대 합동 특별조사위원회 기자회견에서 백 씨의 주치의 였던 백선하 교수가 사망진단서 작성 경위 등을 설명하고 있다. 2016.10.3

최근 서울대병원 의사 백선하의 소신을 빙자한 고집이 많은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유가족은 물론이고 의대생들과 의대 동문들이 들고 일어났다. 대한의사협회는 병사진단이 의협지침에 어긋난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대병원 대책위도 만장일치로 백선하의 진단이 잘못되었다고 판정했다. 그래도 진단서 변경을 거부하는 백선하의 뻔뻔함에 질린 나머지 의사라면 모두 진저리가 나겠지만 상당히 보수적이고 체제순응적인 대한의협이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은 결코 작지 않은 변화다. 최순실 게이트 등과 더불어 박근혜 정권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다.

87체제 성립 이후에 집권한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말이면 예외없이 레임덕에 시달렸으므로 임기 4년차가 끝나가는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하면 박근혜 정권의 레임덕 진입보다 훨씬 더 큰 변화의 전조로 해석할 수 있다. 과도한 경제력 집중과 정경유착에도 불구하고 재벌은 한 때 수출과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인정받았다. 언제부터인가 재벌은 왜곡된 소유구조와 독점으로 시장경쟁과 성장을 가로막는 위험요인으로 간주된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자부하던 관료집단은 막상 한국경제의 위기 앞에서 극도로 무책임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부 검찰 엘리트들의 탐욕에서 보듯 법치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검찰이 거꾸로 법치주의를 위기에 빠뜨리는 핵심 당사자로 전락했다. 우리사회를 지탱하고 이끌던 근간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치의 무기력증은 다른 어느 분야보다 심하다. 지금의 각종 말기적 현상이 박근혜 정권에 국한된 것이라면 다가올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크게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야권으로의 정권교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여도 야도 아닐 뿐더러 아예 정치권 밖에 있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기성 정치권 전체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과거에도 고건과 문국현에 대한 상당한 지지가 있었고,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를 불러내었던데서 보듯이 그다지 새로운 현상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은 87체제의 한 구성요소인 기존 정치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요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야권 대선 후보들의 구호를 보면 그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는 것 같다. 다들 정권교체라는 표현을 피하고 경제교체(문재인), 정치교체(안철수), 시대와 미래교체(박원순), 시대교체(안희정) 등을 말하고 있다. 다분히 추상적이고, 담긴 뜻도 잘 모르겠다. 대충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이겠거니 할 뿐이다. 더 급진적인 동시에 더 구체적인 기획이 필요하다. 필자라면 주류교체 또는 주도세력 교체를 생각해 본다. 정도전이 고려의 주류였던 권문세족을 청산하고 신진사대부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듯이 근본적인 변화는 언제나 주도세력의 교체다. 친일파에서 친미파로 이어지고, 산업화의 열매를 독식하면서 거대한 기득권세력으로 굳건히 자리 잡은 한국사회의 주류, 즉 영남, 강남, 재벌, 정치검찰, 고급관료, 수구언론, 족벌사학 등으로 이루어진 주도세력을 신주류로 교체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국민들은 큰 변화를 기대했다. 철저한 비주류 출신이고, 탈권위적인 스타일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 문제 특히 재벌에 대한 인식이 날카롭지 못했고, 준비가 부족했다. 취임 일 년 만에 그는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막히고 일부 포획되면서 "새로운 시대의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구시대의 막내가 되는 것 같다"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이번에는 어찌될까? 모든 전조현상이 착시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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