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님들이 뿔났다.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서울대 교수’ 124명은 6월3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소통과 연대의 정치’를 요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시국선언에는 언론자유의 후퇴, 사법부의 독립성 훼손, 4대강 정비사업으로 탈바꿈한 한반도대운하, 전직 대통령에 대한 강압수사, 용산참사 등 현안에 대한 비판적 주장이 담겼다. 서울대 교수들에 호응하듯 이날 오후에는 중앙대 교수들 67명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동국대, 성균관대, 성공회대, 연세대, 한신대 교수들도 시국선언을 예고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이 시국선언은 큰 관심을 끌었다. 시국선언, 서울대 교수, 서울대 등이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을 올렸고 4일 대부분의 조간들은 1면 머리기사로 이를 다뤘다. 네티즌들은 포털사이트 기사에 달린 댓글과 각종 게시판, 블로그 등을 통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이 이런 것 아니겠느냐’며 교수들을 지지하고 있다.
일단 교수님들의 결정을 지지한다. 지식인들의 행동이 도화선이 되어 정부의 오만과 독선이 방향을 틀 계기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이동관 대변인의 숫자놀음은 대꾸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 그렇게 숫자놀음이 하고프면 30.5%의 지지를 받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있는 분과 먼저 상담할 일이다. 조선일보의 난독증 역시 말하면 입이 아프니 논설위원들께 시국선언문 다시 한 번 정독해보시란 말로 넘어가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 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여러 번이라도 읽어보시라.) 기자회견장에 난입한 보수단체 회원들? 그분들은 그저 시국선언의 들러리를 스펙터클하게 선 것에 불과하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니다. 교수님들의 행동, 당연히 지지한다. 보수적인 교수사회에서 그것도 국립대 교수들이 정부에 이런 ‘반기’를 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생각해 보라, 민주주의가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갑자기 위기에 처했는가. 대운하사업이나 미디어법, 집시법, 용산참사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위협은 몇 주 만에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지금의 시국선언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 야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번 시국선언은 ‘안전이 확보된 이후에야 슬그머니 기어나와 숟가락을 올려놓는 것 같은 기회주의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학교수는 한국사회에서 매우 안정적인 자리다. 특히, 서울대는 한국 학벌카스트의 정점에 서 있는 기관이다. 서울대 교수들 역시 ‘대한민국 최고 지성’이라는 상징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분들이다. 아무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을 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회적 명분을 내걸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건 그것대로 용기라 할 만하다. 정권에 소통을 요구할 거냐, 퇴진을 요구할 거냐, 사과를 요구할 거냐 등등 여러 가지 요구들과 판단들이 있겠지만, 지식인들의 응집된 요구는 이런 시시콜콜한 논의를 뛰어넘는 바가 있다. 물론, 이는 ‘지식인’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들을 생각하면 그렇단 얘기다.
그러나 나는 좀 더 ‘위험한’ 지식인들을 보고 싶다. 끝까지 냉정을 유지하고 결론을 유보한 채 종국에서야 판단하고 결론짓는 지식인이 아니라, 뜨겁게 논쟁하고 현실에 부딪칠 수 있는 돈키호테형 교수 지식인을 보고 싶다. 시스템의 충실한 수호자로서 자신의 모든 특권과 상징자본을 그러쥔 채 웅크린 직업인으로서의 교수가 아니라, 언제나 사회적 역관계가 뚜렷해진 상황에서 대세에 몸을 싣는 심판관으로서의 지식인이 아니라,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자유와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공기가 희박해질 때 급박한 위기신호를 보낼 수 있는 지식인 교수들을 보고 싶다. 물론, 당연하게도 모든 교수들이 그렇게 될 필요도 까닭도 없겠지만 최소한 그들에게 가 닿는 사회적 지위와 존경에 대한 응답 차원에서라도 최소한의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여,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우리 사회가 가진 최후의 안전판인가, 아니면 ‘대세’가 판명이 난 이후 안전할 때만 작동하는 삼류 경보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