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일 오전 서울 경복궁 흥례문 앞뜰에서 거행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헌화를 하려던 순간 백원우 민주당 의원이 '사죄하라'며 소리치다 경호원들에게 입을 틀어막히고 있다.ⓒ 오마이뉴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다시 열린 광장을 거닐며, 활동가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던 날, 제가 썼던 노무현 퇴진 성명이 단체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기억이 납니다. 여전히 그날의 인식이 섣불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와 FTA 반대를 외쳤던 시절, 공개 칼럼을 통해 노무현에게 돌을 던져야 할 때라고 선동하던 글을 쓰던 비분함이 선명합니다. 그는 무능하다기보단 그에게 걸려있던 최소한의 시대의식마저 배반했던 통치자였습니다.

그런 노무현을 설명하는 표현 중에 ‘국민에게만 빚진 대통령’이란 레토릭이 있었습니다. 족히 수백개는 제작됐을 추모 영상에도 자주 등장하더군요. 6년 쯤 전에 그 표현을 자주 이렇게 받았었습니다. ‘난 받을 빚이 없는데’. 그 표현이 6년여 만에 정확히 거꾸로 뒤집어져, 익숙한 질문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우리들 중에 한때 노빠 아니었던 사람이 있는가”라고 누가 물었다고 합니다. 굳이 대답을 하자면 6년 전과 같습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니었습니다.

늙은 것일까요, 아니면 닳은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집니다. 노빠를 가늠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지, 노빠였는지를 밝히고 안 밝히는 것이 모든 본질을 덮는 쟁점이어야 하는 것인지 갑갑해집니다. 노무현을 추모하는 것은 노빠의 몫이니, 나는 노빠가 아니니 보다 선명하게 용산을 추모해야겠다고 하면 한층 ‘좌파’스러운 것인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 이유 알 것도 같지만 애써 알아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설픈 논쟁을 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서는 방식이 무엇인지 확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듭니다. ‘입진보’,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 세상만사 모든 일에 불평불만을 터뜨리며 냉정하게 또 쿨하게, 핫한 이슈들은 골라서 외면해버리면 과연 뭐가 남게 될까요? 쎄보이는 ‘간지’가 남나요. 아님 보편적 카타르시스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까칠함의 과시가 풍족한 나르시시즘이 되어 주나요.

정확히 1년 전 오늘쯤, ‘촛불집회 귀퉁이에 앉아 있는 운동권, 당신에게’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집회 대오 귀퉁이 보도블록에 앉아 있는 활동가들을 향한 척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몰입이 되지 않는 집회에서 부유하고 있는 제가 안쓰러워 견딜 수 없던 밤 밀어 올렸던 글이었습니다. 다시, 광장이 열린 오늘도 마찬가지 기분이 듭니다. 한 맺힌 망가에 완전히 이입되지도 않고, 낯 뜨겁기보단 너무 질이 낮은 찬양이어서 남우세스럽던 추모사들이 오히려 몰입을 방해하던 그런 집회였습니다. 당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에는 딱 1년 전 그날이 그랬던 것처럼, 역동(力動)이 있었습니다.

오늘자(30일) 경향신문 1면이 물었습니다. ‘이 추모의 민심은 무엇인가?’ 다른 텍스트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그 한 문장뿐이었습니다. 물론, MB를 향한 질문입니다. 당신에게 그 질문은 어떻게 읽힙니까? 절대권력을 누리며 열사를 만들어냈던 노무현 대통령의 5년을 희석시키는 물타기로 읽힙니까? 아니면 파병, 대연정, 비정규직 탄압, FTA로 이어지는 반동의 시간이 산화되어 희망의 주름으로 다시 제본되는 박제로 읽힙니까?

노무현의 잘못과 노무현의 죽음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노무현 정권의 무능과 이명박 정권의 무력은 차원을 달리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과 다시 열린 광장이라는 ‘공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토록 중요하다던, 그리고 정말 중요한 용산 철거민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의 죽음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 이 시간 기꺼이 광장을 열어 그 위에 서야 합니다.

입을 움직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은 가장 간단한 도피입니다. 늦은 밤 광장에선 용산 대책위 활동가들이 광장에 천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박종태 열사의 영정이 모셔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부질없어 하던 죽음이 그 이전의 죽음들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젠, 당신의 차례입니다.

노무현의 죽음에 내포된 소수성과 기꺼이 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무현이라고 하는 상징적 열매를 통해 결론을 맺자는 뜻이 아닙니다. 노무현에 이른 과정의 ‘열정’과 노무현을 보낸 ‘현장’의 비장함과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선 답이 없습니다. 노무현을 죽은 신화로 박제할 것이 아니라 노무현을 매개로 한 ‘현장의 열정’을 전유할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합니다.

최규하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이 다르지 않은 국민장인데, 왜 이 굿판을 벌이고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디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논리적 정합성을 위한 논리가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서 치미는 생각 말입니다. 철거민의 죽음, 노동자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이 다르지 않은데 왜 이 찬양에 내가 동참해야 하느냐고 물으시겠습니까? 목숨에 특별한 값이 있어 기억이 남달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죽음들이 잇닿아 있다면, 당신은 광장에 서야 합니다. 결국 하나의 극점으로 귀결되는 죽음의 책임을 묻기 위한 그곳에서 당신과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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