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은 보신 후 읽어주세요.

<터미네이터4>를 본 날은 그날이었다. ‘그 날’이었다. 바로 ‘그 날’이었다. 그 주의 총 수면시간이 열 시간을 넘지 않는 바람에 멍한 머리로, 아침에 뉴스를 보자마자 잠이 확 깨어 출근했지만 아니나다를까 하루 종일 실수투성이였다. 손님이 뭘 청하면 서비스직 비정규직 주제에 이런 날 자꾸 뭘 달래 하며 버럭 성이 나고, 그래도 간신히 흩어지는 정신줄을 모아서 네 손님- 하고 안 나오는 미소를 짓고, 유리컵 몇 개를 작살낼 뻔하면서 업무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끝나자마자 어딘가로 처박히고 싶어서 일단 황망히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집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영화 보러 나오겠냐는 제의가 와서, 무슨 영화인지 모르고 일단 그러마고 하고 그리 갔다.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집에 있는 이부자리든 컴컴한 영화관이든 일단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하기에는 어디라도 좋았다. 이렇게까지 소주가 나를 부른다, 하고 강렬하게 느꼈던 적은 없었다.

나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팬도 아니고, 그러므로 팬들이 이야기하는 평행 우주의 논리와 이 시리즈의 비논리적인 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단, 이렇게 즐기기 위해 노력했던 영화는 처음이었다. 보통 영화를 볼 때 관객들은 자아, 나는 돈을 냈어. 어서 나를 즐겁게 해 봐, 하는 거만한 태도로 관람에 임하기 마련이지만 푹 빠지기 위해서, 정신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서, 딴 생각을 하기 위해 영화에 죽도록 몰입하려 이만치 노력했던 영화는 처음이었다. 희한한 경험이었고, 색다른 경험이었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노력이었다.

다행히 전작 <미녀삼총사> 시리즈로 매끈한 액션신을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감독 맥G는 이번에도 새로 나온 스포츠카처럼 잘 빠진 액션 장면을 듬뿍듬뿍 넣어서 시각적 쾌감을 선사했다. 이건 어떻게 된 거고 저건 어떻게 된 거야, 하는 물음이 나올 만큼 각본에는 엉성한 맛이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딴 생각만 하게 해 준다면 뭐든 용서하겠어, 하는 마음이 되어 있었으므로 정말이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배우들도 나쁘지 않았다. 저항군 리더 존 코너 역을 맡은 크리스찬 베일의 카리스마는 여전했고, 마커스 역을 맡은 샘 워싱턴의 듬직한 모습은 문 블러드굿이 연기한 전투기 조종사 블레어가 아니더라도 반할 만큼 기대고 싶은 느낌이었다. 한국계라고 알려진 문 블러드굿의 동양적이면서도 미끈한 외모는 생동감 넘치고 매력적이었며 <스타 트렉 : 더 비기닝>에도 등장했던 카일 리스 역의 안톤 옐친은 오오 녀석 잘 커라, 싶게 파르르하니 이뻤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쩐지 인간치고는 지나치게 강하다 싶더니 영화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수상해지면서 결국 기계와 인간의 합성체라는 것이 드러난 마커스 라이트는 인간 편에 붙는다. 그리고 인간 저항군들은 그를 알뜰하게 착취한다. 이 영화는 터미네이터가 인간들 쪽에 붙었다가 안팎으로 알뜰하게 착취당하는 이야기인데, 딴 생각을 하려고 죽도록 노력하고 있던 나는 완전히 당했다. 그날 떠나간 ‘그’가 영웅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추락에는 그리스 비극을 연상케 하는 슬픈 장엄함이 있었고, 다 내주고 착취를 완성하는 터미네이터의 모습은 죽도록 딴 생각을 하려 한 나를 정확히 바로 그 생각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울고 말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게 영화 때문은 아니라는 거였다.

여아낙태 1위의 도시 대구에서 출생, 목회자인 부친의 모든 희망에 어긋나게 성장, 기어코 말 안 듣다가 고등학교를 2 달만에 퇴학에 준하는 자퇴,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운 좋게 입학했으나 7 년만에 졸업, 간신히 영화 <언니가 간다>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으나 전국 18만 8천으로 종결 후 좌절, 먹고 살려고 아르바이트와 직장생활 등 애써 봤으나 여전히 도시빈민 겸 철거민 상태,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통합과정 전문사에 진학했으나 등록금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달마다 신불자가 될 위기에 처한 상태로 휴학 중이며 일단 살아 있으려고 부단한 노력 중. <한겨레신문> <시사IN>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쓴 책으로 <네 멋대로 해라> <불량소녀백서> <질투하라 행동하라> <당신의 스무 살을 사랑하라> <그래도 언니는 간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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