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양복을 입고 한 쪽 팔에 상주임을 알리는 삼베띠를 두른 민주당 의원들이 27일 오후 6시40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주변 한 쪽 구석에 모였다. 원혜영 전 원내대표와 강기정 의원, 이석현 의원, 안민석 의원과 당직자 10여명은 경찰버스 사이 작은 틈으로 광장을 둘러싼 경찰을 향해 ‘방송 차량을 빼달라’고 수없이 외쳤다. 그러나 경찰 가운데 그 누구도 이들의 외침에 반응하지 않았고, 이들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민주당 의원들의 굴욕이자 국민장 상주들의 굴욕이었다.

▲ 전경차에 둘러싸인 추모제 방송차 ⓒ 나난
시민사회·종교 단체로 구성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시민추모위원회’(이하 시민추모위)가 27일 오후 7시부터 서울광장에서 열 예정이었던 추모 행사를 정부는 불허했다. 당초 이날 오전 오세훈 서울시장은 사실상 광장 개방 입장을 밝혔으나, 오후 5시30분 쯤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은 주최 쪽에 불허를 통보했다. 오후 3시부터 광장 안쪽에 방송차량을 배치하는 등 행사를 준비하던 시민추모위는 덕수궁 뒤쪽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장소를 급히 변경했고, 경찰은 경찰버스로 광장 안쪽에 배치된 방송차량을 막았다. 이때부터 민주당 의원들의 ‘방송차량’ 탈환을 위한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됐다.

민주당 의원들은 버스 사이의 작은 틈 앞에 서 전경들을 향해 “현장 책임자가 누구냐”고 수없이 외쳤으나, 전경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제 풀에 살짝 지친 의원들은 “국회의원이 왔는데도 이 정도니 국민들에게는 오죽하겠냐”며 경찰의 태도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날 오후 6시45분경, 서울광장을 지휘하던 한 경찰 관계자는 민주당 의원들의 계속되는 항의에 ‘방송차량이 나갈 수 있도록 열어주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정범구 전 의원은 “오후 6시45분쯤 기동대장을 만나 ‘방송차량을 빼달라’고 말했고, ‘열어주겠다’는 대답을 했음에도 도망을 갔는지 30분째 아무 대답이 없다”며 “이명박 정부는 시민이 모이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묵묵부답’인 경찰을 향해 30분 넘게 한 자리에서 같은 말을 쏟아낸 민주당 의원들의 얼굴에는 서서히 지친 기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방패를 든 전경들만이 묵묵하게 이들의 외침을 흘려 들을 뿐, 경찰 관계자가 나와서 의원들에게 설명하는 일도, 이해를 구하는 일도 없었다. 원혜영 전 원내대표는 다소 힘들었는지, 경찰버스 입구에 앉아 버렸다.

▲ 경찰에 항의하다 지친 원혜영 민주당 전 원내대표가 경찰버스 앞문 계단에 앉아 쉬고 있다. ⓒ곽상아
국회 행정안전위 소속인 강기정 의원은 방송차량을 빼내기 위해 경찰청장과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이곳저곳 열심히 전화를 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들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경찰 쪽의 태도에 뿔난 강기정 의원은 “추모객들이 추모 문화제를 열겠다는 데도 광장을 열어주지 않아 분향소 옆에서 하겠다고 했는데 행사 차량을 막고 돌려주지 않고 있다”며 “항의하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전화를 했는데 ‘무슨 일이냐’고 묻더니 ‘식당에 와서 밥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 강기정 의원이 서울경찰청장에게 전화를 하는 모습 ⓒ곽상아
그러는 사이 해는 기울었고, 주변은 제법 어둑해졌다. 아무 반응 없는 경찰에 화가 단단히 난 강기정 의원은 오후 7시40분 또 다시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전화를 했다. “아직도 식사를 하고 있냐? 우리가 기다리는데?”라고 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서울지방경찰청장과 통화한 게 아니라, 그의 비서와 통화했다는 사실이었다.

광장 불허에 대해 참여연대 김민영 사무처장은 “곤혹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오전 11시와 오후 5시15분 두 차례 만남을 통해 추모 행사를 진행하기로 했음에도 오후 5시40분 불허 통보를 받았다. 오후 3시부터 방송 차량을 두는 등 행사를 준비했었는데 갑자기 출입 자체를 막아서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변경된 장소인 덕수궁 옆 행사를 위해 급하게 마련한 방송 차량도 현재 경향신문 앞에서 (경찰에 의해) 막혀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 박영선 의원, 김유정 대변인 등 ‘지원군’이 도착하자 원혜영 민주당 전 원내대표가 경찰에 다시 항의하기 위해 앞장서서 걷고 있다. ⓒ곽상아
오후 8시10분, 의원들이 더 합세하기 시작했다. 송영길 박영선 김민석 의원과 김유정 대변인 등, 세를 늘린 이들은 여전히 묵묵부답인 경찰을 강하게 성토한 뒤 신문을 깔고 아예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들이 자리에 주저앉으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은 참 소박했다. ‘방송차량이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이 한 가지였다.

▲ 연좌농성에 들어간 민주당 의원들 ⓒ곽상아
송영길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상황에 대해 말해야겠다”며 입을 열었다.

“친노냐 아니냐를 떠나서 지금은 온 국민이 경건하게 추모하는 게 마땅하다. 이럴 때 쓰라고 서울광장이 있는 것인데, 일제 식민 치하에서 고종의 장례를 치른 것과 지금이 무엇이 다르냐. (이런 식으로 해서) 시민들을 자극시키지 말고, 내일까지 광장을 전부 개방해야 한다. 시민들이 돌아가신 노 전 대통령을 자유롭게 위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전경차에 둘러싸인 추모제 방송차 ⓒ 나난
당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경찰과 정부를 향한 시민들의 성토는 끝이 없었고, 말 중간 중간 한숨이 섞여 나왔다. “시청 광장은 언제 쓰는 건가” “이게 무슨 국민장이야” “국회의원들한테 이 정도면 시민들한테는 오죽하겠나”…. 현장에서 시민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 정말.”

시민들은 바닥에 주저앉은 민주당 의원들을 향해서도 뼈 있는 말들을 날렸다. 시민들은 “노 전 대통령 살아있을 때 잘하지 지금 와서 왜 이러냐” “그 동안 뭐했냐” “앞으로 경찰이 계속 안 풀어주면 어떡 할 거냐” “야당이 힘이 없어서 (경찰이) 이런 거 아니냐”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지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마무리될 것 같지 않던 상황에 변화가 오기 시작한 건 밤 9시를 넘긴 이후였다. 경찰청장,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모두 연락이 닿질 않자, 김유정 대변인은 오후 9시10분 쯤 이달곤 행안부 장관에서 전화를 걸어 현 상황을 설명하고 방송 차량을 빼 줄 것을 요청했다. 김 대변인은 “통화에서 이 장관이 ‘경찰 판단에 맡겨 조치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이 계속해서 방송 차량을 내보내지 않으면 강희락 경찰청장을 항의 방문할 계획이었다”고 덧붙였다.

비슷한 시각, 민주당 의원들은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을 항의 방문하려고 자리를 떴다. 의원 일행이 출발한 지 5분 여 만에 서울지방경찰청 쪽으로부터도 “방송 차량을 내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현장에서도 “무전 지시를 받았다”며 방송 차량을 내보내기로 했고 밤 9시38분, 민주당 의원들이 3시간 동안 항의를 한 끝에 방송 차량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번 항의로 서울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버스 전체가 다 빠지는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대변인은 “3시간 넘게 의원들이 항의해 방송 차량을 빼줬는데, 버스 전체가 빠지는 게 가능하겠냐”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3시간의 항의 끝에 민주당은 방송차량을 꺼내올 수 있었다. ⓒ곽상아
30여대의 경찰버스로 꽉 막힌 광장에서 민주당은 무력했다. 광장을 경찰버스로 둘러싼 경찰 앞에서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상주인 민주당 의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현장 책임자를 부르고, 항의 전화를 하고, 자리에 주저앉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이들에게 경찰은 전화를 피하는 등 갖은 방법으로 철저하게 무시하는 굴욕을 안겨줬다.

‘방송 차량을 내보내는 것’. 민주당 의원들의 이 소박한 희망은 경찰 버스 앞에서 굴욕적인 3시간을 보낸 뒤 현실로 이뤄졌다. 하지만 실제 이와 같은 민주당 의원들의 무능력과는 별개로 “시청 광장을 열어달라”는 수많은 시민들의 요구를 진정 실현할 의지는 있는지 의문이다. 진정 시민들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3시간이 아닌 24시간을 그 앞에서 꼬박 세우면서, 방송차량이 아닌 30여대의 경찰 버스가 나갈 때까지 버텼어야 하지 않았을까.

방송 차량이 빠져나간 뒤 이들은 상황이 마무리됐다는 판단 하에 덕수궁 분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찰 버스로 둘러싸인 광장을 뒤로한 채 분향소로 향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발걸음이 가벼웠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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