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내가 부둥켜 안을 때 모순덩어리 억압과 착취, 저 붉은 태양에 녹아버리네.” 민중가요 ‘어머니’의 한 대목입니다. 집회에서 민가협 어머니들이 소개될 때 우리는 모두 일어나 저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은 돌이켜 놓고 생각해보면 정말 힘든 때였습니다. 아직 87년 6·10의 기억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여전히 군사독재정권은 계속되는. 화염병처벌법이 제정되고,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전교조 결성식에 ‘사수대’로 나선 제 동기가 첫 구속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집회는 여전히 관성처럼 2~3일 간격으로 열렸고, 매주 구속자가 나왔습니다. ‘어머니’를 부르는 일은 더 많아졌습니다.

▲ 故 노무현 전 대통령 ⓒ여의도통신
모두들 아시는 것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의 타이틀은 저 어머니 노래에서 따왔습니다. 노 대통령은 김근태씨처럼 직접 운동단체를 이끌지 않았지만, ‘운동권’과 가까운 정치권 인사였습니다. (인권변호사로 노 대통령은 87년 당시 부산지역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공동대표도 맡았습니다.) 저희 매체에서도 지금 ‘노 대통령과 얽힌 개인적 추억’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갑작스런 서거 이후 이런저런 지면에서 ‘그와 얽힌 일화’를 소개하는 인사들이 부쩍 눈에 띕니다. 저도 제 기억의 한 자락을 보태려고 합니다.

그를 지근거리에서 처음 본 것은 1997년 대선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기자도 아닌 학생의 신분이었습니다. 신촌 현대백화점 앞이었는데, 눈발이 막 날리던 초저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원유세는 실패작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지 그런 자리라면 당에서 동원한 사람이라도 있게 마련입니다만, 그의 연설을 듣고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10명에 못 미치는 행인에 불과했습니다. 왜 DJ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구체적인 워딩은 제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신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가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언론사에 입사한 후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게 된 것은 2002년 대선 직전, 제가 다니던 언론사와 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후보초청 토론회 자리였습니다. 제일 인상에 남는 것은 사무실을 방문한 노 전 대통령이 제일 먼저 찾은 이들이 기자나 편집국장, 사장이 아니라 회사 제일 안쪽에서 일하던 업무국 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성큼성큼 그쪽으로 걸어간 노 후보는 먼저 악수를 청하더군요. 그 장면을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그게 저 양반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구나. 물론 외로 꼬아볼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다른 기자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니 그 친구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계산된 행동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겠죠. 사실 후보초청 토론회를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설마 이 양반이 대통령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 벌어진 드라마틱한 과정은 다 아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어머니’ 노래를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도 ‘어머니의 눈물’은 계속됐죠. 매주 목요일이면 보랏빛 스카프를 두른 민가협의 시위는 어김없이 열렸습니다.

저는 노 전 대통령의 지지자가 아닙니다. (여전히 저에게는 ‘나는 살고 싶다’며 ‘프레지던트 노.무.현.’을 절규하는 김선일씨의 목소리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진보가 소중히 여기던 몇몇 가치를 가져가 자신의 방식으로 전유했습니다.

수구세력의 ‘참여정부=좌파정권’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맞서 진보진영은 ‘노무현 대통령·참여정부는 좌파진보정권이 아니며, 오히려 보수주의 정권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반박해왔습니다. 그가 파병과 FTA 등에 취한 입장을 볼 때 진보의 진단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보는 그에게 이용당하거나 뺏기기만 한 걸까요.

그가 떠난 빈자리에 남은 큰 공백도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몸을 던져 남긴 숙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한국사회의 과제로 남을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경향신문이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Weekly경향의 기자다. 사회팀장을 맡고 있다. 시민단체 KYC 등과 함께 풀뿌리공동체를 소개하는 <도시 속 희망공동체 11곳-풀뿌리가 희망이다> 책을 냈다. 괴담&공포영화 전문지 또는 ‘제대로 된(또는 근성 있는)’ 황색잡지를 만들어보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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