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일 줄은 아는데 살릴 줄은 모르는, 살인 정권이다. 백남기 님이 돌아가시자 기다렸다는 듯 부검 운운하며 두 번 죽이는, 살인 정권이다. 죽는 줄은 아는데 살릴 생각은 없는, 살인 정권이다. 세월호 참사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시는 이런 일 겪지 않도록 진상을 규명하자는데 필요 없다며 끝내려 드는, 살인 정권이다. 어쩌면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들의 죽음

10여 년 전 서울역에서 ‘노숙인 폭동’이 있었다. 화장실에 쓰러져있는 노숙인을 발견한 사람이 역무원을 불러왔다.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았다. 역무원의 다음 행동이 문제였다. 그는 짐수레를 끌고 와 노숙인을 실었다. 구급차를 부르지도 않았고 들것을 준비해오지도 않았다. 노숙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새삼스럽게 물어본다. 노숙인들은 왜 분노했을까. 서울역 어딘가에서 잠을 청할 뿐, 서로 이름도 삶도 모르는 타인이다. 그들이 유달리 인간적일 리도, 유난히 폭력적일 리도 없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죽음이 천 한 장 덮어주지 못하는 쓰레기 취급을 당할 때, 그들은 자신이 살아서 겪는 시간을 보았던 것이다. 살았지만, 죽어도 그만인 존재라 말하는 세상.

다시 새삼스럽게 물어본다. 왜 다른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았을까. 그냥 ‘노숙인’의 죽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그렇게 죽을 만도 하다고 여겼으리라. 그래서 ‘폭동’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두려워했으리라. 나도 그때는 ‘폭동’이 아님을 해명하려고 했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딱지를 붙여 서로 등 돌리게 하고 겨루게 한다. 활동보조인이 없어 불에 타 죽은 사람의 죽음은 장애인의 죽음일 뿐이며,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다 죽은 사람의 죽음은 노동자의 죽음일 뿐이라고. 그러니 네가 살 길은 그들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그러다가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마주하게 됐다.

사람을 죽인 정부

세월호 참사는, 배가 침몰해서 사람이 죽은 사고가 아니었다. “살려주세요”라는 최초 신고가 있은 후 마지막 생존자가 탈출할 때까지 90분의 시간이 있었다. 광주지법 재판에서 공개된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배 밖으로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최장 9분 28초였다. 10분이면 다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을 90분 동안 가둬놓고 바다에 수장시킨 사건이었다.

선장과 선원들이 살릴 수 있었다. 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선장은 살인죄를 선고받고 무기징역을 사는 등 선원들도 처벌 받았다. 사람을 살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기 때문이다. 살리지 않은 책임은 정부에게도 그대로 있다. 침몰이 인지된 시점부터 당연히 구조는 정부 책임 아래 있으며, 특히 선장과 선원이 탈출한 9시 40분경 이후의 상황은 온전히 정부 책임이다. 그때에도 살릴 수 있었고 살려야 했다. 그러나 살리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사건 앞에 애도하고 투쟁했다.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남아 있는 가족의 고통이, 슬프고 아팠기 때문만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죽음을 마주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죽음을 발견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으니, 진실을 밝히자 했다. 진실의 길에서 ‘우리’는 차츰 넓어졌다. 모든 서러운 죽음을 우리들의 죽음으로 품어가는 진실은, 그만큼 간절했다.

진상규명 필요 없다는 정부

통상의 재난참사에서는 사고의 원인과 배경을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래야 죽음을 더욱 앞서 피하고 더욱 크게 막을 수 있다. 화재는 왜 발생했는지, 건물은 왜 무너졌는지, 배는 왜 침몰했는지…….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그럴 수 없었다. 못 구한 것이 아니라, 안 구한 것부터 책임을 물어야 하는 참사였다.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특별법에 따라 1년 6개월의 조사 기간을 부여받았다. 부족한 듯 했지만, 피해자들이야말로 하루라도 빨리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조사기간 내내 사사건건 방해를 하며 진상 규명을 미뤘다. 그러더니 이제는 법도 무시하며 조사 기간이 끝났다고 우기고 있다. 국회에 특별법을 개정하라고 요구했더니, 새누리당은 회의가 열리는 족족 개정안을 안건조정위로 집어던졌다. 진상 규명이 필요 없다는 정권이다.

해경 123정장은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3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사법부는 그에게 현장에 도착한 이후의 죽음들을 책임지라고 했다. 다만 “해경 지휘부나 같이 출동한 해경들에게도 공동책임이 있어 피고인에게 모든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가혹”하다며 형을 낮춰주었다. 다른 책임은 어디로 갔는가. 청문회에서 해경 지휘부의 잘못이 드러났지만 누구 하나 기소되거나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줄줄이 승진했다. 수사를 요구하는 특검요청안도 국회에 잠들어있다.

죽어도 그만이라는 정부

책임은 해경에 그치지 않는다. 청와대는 해경이 승객을 구조할 시간에 영상을 보내라는 둥 구조 방해만 일삼았다. 그 후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청해진해운의 지시였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당일 청해진해운과 국정원이 7차례 통화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전부터 특수한 관계였다는 점도 드러났다. 그러니 조사해야 했다. 구조하지 않음에 연루된 이 모든 관계자들을.

대통령이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다.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면 보고를 제대로 못한 책임자들을 처벌하고, 지시가 충분히 이행되지 못했다면 작업을 제대로 못한 책임자들을 처벌하면 된다. 그러나 자료 제출도 증인 출석도 거부하며 무엇을 했는지 밝히지 않겠다고 버틴다. 나름 마음을 졸였다고 흘린 눈물은 거두시라. 정부는 그냥 아무 것도 안했다. 책임도 없다고 한다.

죽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죽었다. 있어서는 안 될 죽음들이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살피고 밝혀야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을 방법을 알게 된다. 잘잘못을 가려 책임을 따져 묻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재발방지대책이 실효를 가질 수 있다. 진상규명이 필요 없다는 정권의 주장은 결국, 너희는 살릴 필요 없는 사람들이라는 통보다.

죽을 수 없는 우리

우리는 그렇게 죽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침몰하는 배에 버려져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기업의 탐욕에 목숨을 내줘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욕과 차별 속에 죽어가도 그만인 사람이 아니다. 구명조끼를 입혀주며 거리에서 어깨 결으며 함께 살려 했던 것이 죽어야 할 이유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는데, 국가는 사람을 살릴 생각이 없구나. 그래서 우리는 세월호 참사 이후 다른 사회를 만들자고 약속했다. 다시, 인간의 존엄을 세우자고 약속했다. 작년 11월에도 우리는 그렇게 거리로 나왔다. 함께 살자고 외치며 모였다. 정부는 서로의 존엄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두려워, 물대포를 앞세우며 살인진압을 벌였다.

그러나 꿈쩍 않는 정권의 벽 앞에서 우리도 두려워했다. 벽을 깨야 하는 이유를 확인할 때마다, 그만큼 벽이 깨지기 어렵다며 멈칫거렸던 것은 아닐까. 백남기를, 한상균을 그곳에 남겨두고 먼저 물러섰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 저 벽을 깨주기 바라며 구경만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들의 죽음 앞에 물러서지 말자

세월호 참사에서 사람을 살리지 못한 ‘모든 책임’의 무게가 3년밖에 안 되는가. 사건에 연루된 자들 각각에게 ‘모든 책임’이 없으면 ‘아무 책임’도 없는 것인가. 아니다.

진상 규명은 사건의 관련자들 각각에게 책임을 어떻게 분배할지 밝히는 과정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끝내 거부한다면 책임을 물을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사람을 살리지 않은 ‘모든 책임’을 정권 자체에 묻는 것. 자신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고 했던 박근혜는 물러나라!

박근혜 정권이 무너진다고 우리가 살게 될 리 없다. 그러나 서로를 살리며, 살기 시작할 수 있다. 이 정권을 깨야 진실이 시작된다. 이 정권을 깨야 우리가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이 있지 않은가. 수학여행이 추억일 수 있는 세상, 먹고사는 걱정에 죽고 싶어지지 않는 세상,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세상, 당당함이나 즐거움을 그려볼 수 있는 세상…….

백남기 님이 물러서지 않았던 그 자리를 다시 지켜야 한다. 더 많이 모이고 더 오래 버티고, 더 널리 알리고 더 깊이 느끼며, 더욱 강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다음 길이 열릴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한다. 10월 1일 백남기 농민 추모대회에서 함께 외치자. 우리 그렇게 죽어도 되는 사람 아니라고. 세월호 참사 900일 문화제에서 함께 선언하자. 진실의 끝은 우리가 정한다고, 우리는 이 길의 끝까지 함께 간다고. 모이자 10월 1일, 살기 위하여.

‘폭동’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박근혜 정권에 그 두려움을 모두 되돌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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