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는 현실을 반영한다. 동시대를 뛰어 넘는 시공간을 그린다고 해도 이야기와 갈등 구조는 동시대의 ‘사람 사는’ 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이 투영되지 않는 ‘판타지’와 ‘픽션’은 없다. 서민 금잔디가 최고 재벌가의 2세 구준표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일이 ‘현실 불가능한 것’일지 몰라도, 미디어는 그들의 사랑 얘기가 수천만 명의 러브스토리 중에 하나라고 믿어지게 재현해야 한다. 그래서 ‘현실’을 담지 않는 콘텐츠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장르와 무관하게 말이다.

뉴스는 어떠한가. 뉴스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즉각 비난받는다. 시사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예능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의 ‘오락물’은? 완전히 자유롭다. 연예인들끼리 앉아 그들만의 시시콜콜한 뒷얘기를 아무리 떠들어대도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며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다. 뉴스와 오락물의 중간은 없다.

▲ KBS 드라마 <남자이야기>의 한 장면 ⓒ <남자이야기> 캡처
그렇다. ‘오락’은 선천적으로 탈정치적인 영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락’을 탈정치적 영역으로 분류하는 오류를 범한다. ‘오락’으로 대중들을 정치의 영역에서 구원하겠다는 이데올로기로 말이다. 하지만 ‘오락’처럼 무한한 상상력을 꾀할 수 있는 장르가 또 있을까. 결국 탈정치화된 ‘오락’을 부추기는 건 상상력 빈곤의 후진성이며,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결과다. 그래서인가. ‘오락’에서 사회 비판과 정치 풍자의 실마리를 찾으면 반갑고, 즐겁고, 더욱 통쾌하다.

월화수목, 토일. 풍자하는 TV

월요일과 화요일 밤 KBS 드라마 <남자이야기>가 우선 시선을 끈다. <남자이야기>는 ‘언론’을 비꼰다. 재벌 2세 채도우가 “기사 막으세요”라는 명령을 하면, 신문사 편집국에서 기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진다. 어떤 기사냐고? 철거민의 현실을 다룬 기사다. (<남자이야기>에 대한 구체적인 리뷰는 미디어스 “드라마가 대신 쓰는 ‘대한민국’ 르포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물론 언론사의 데스크와 재벌의 관계를 두 눈으로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권력 관계에 의해 소외된 이들의 현실이 묻히고, 사라지는 일은 흔하다. 착각할 만큼 현실적이지 않은가. 용산참사가 눈에 아른거리지 않는가. 검찰은 용산참사 수사기록 3000여 쪽을 공개하지 않고, 유가족들을 잡아가고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없이 집회는 불허하고, 유족까지 잡아가고 있지만 신문은 보도를 삼키고 있다. 그래서 <남자이야기>에서 눈길을 끄는 건 한류 스타 박용하보다 사회 현실에 대한, 그야말로 ‘명품’적인 재현일 테다.

SBS 드라마 <시티홀> 역시 훈훈하다. 수요일과 목요일에 방영중인 <시티홀>은 현실정치를 곳곳에 장치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말단 공무원이 시장이 되고, 부시장이 대통령의 야욕을 가지고 있는 설정 자체가 이미 노골적인 ‘정치’의 소재화이다. 이 장치와 소재를 통해 구석구석 ‘현실’ 정치의 치부를 극대화시키고, 그런 ‘정치인’들과 함께 호흡하는 시민들의 분노를 ‘신미래’라는 말단 공무원의 고군분투를 통해 드러낸다.

▲ SBS 드라마 <씨티홀>의 한 장면 ⓒ <씨티홀> 홈페이지
지역을 대표하는 토산물 아가씨 대회에 참가한 그녀는 1등을 하고도 제대로 된 상금을 받지 못한다. 상금은 시장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시청에서 ‘잘려 나간’ 그녀는 1인시위로 응수한다. 호소문을 작성하여 면대면으로 시민들을 만나고, ‘집회’에 참석해줄 것을 호소한다. 약속된 시간 2시는 넘었지만, 엄마, 아이, 직장인, 신부, 수녀, 군인, 학생, 할머니, 할아버지…, 계층을 막론한 이들이 시청 정문 앞에 하나 둘씩 모인다. 촛불의 경험이 없었다면, 너무나도 미화된 ‘신미래’의 소영웅주의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장면이다. 하지만 지난 1년, 촛불이라는 경험을 한 우리네에게 ‘신미래’보다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여성에게서 짜릿함을 느낀다. “사람이 왜 이렇게 권력을 가지려는 줄 알아? 남용하기 위해서야”라는 민주화의 말이 비수처럼 꽂히는 이유도, 싸잡아 한 무더기로 두고 욕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분명이 시대의 권력자는 힘을 ‘남용’한다는 현실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주말이 되면 예능프로그램이 나선다. 토요일, <무한도전>의 자막 신공 ‘김태호 PD’가 기다리고 있다. 두고두고 회자될 수밖에 없는 ‘춘향뎐 편’에 등장한 ‘말하면 감옥행’ 설정은 말하기 무서운 나라가 되어버리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예능프로그램은 직설화법은 피한다. 풍자와 둘러치기로 살짝 비껴가면서 그대로 정면을 향해 ‘자막’을 날린다. 이미 김태호 PD는 “미국산 소 백스텝으로 쥐 잡는 격”, “졸속 제정 법률의 피해자”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딨나” 등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자막으로 시청자들에게 무한환호를 이끌어냈다.

일주일의 마침표는 <개그콘서트>(이하 개콘)가 찍는다. ‘뿌레땅뿌르국’은 정치풍자로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이면 입이 좀 텁텁해도 군제 면제, 대기업 회장이 아버지면 간지럼을 잘 타는 이유만으로도 군제 면제. “병역 비리가 없는 나라” 그 나라에는 ‘일 년에 영화 한 편 안보는 사람’이 문화부 장관이 되고, ‘버스 요금 얼마인지 모르는 사람’이 교통부 장관이 된다. ‘뿌레땅뿌르국’인 것 같은가. 아니다. 바로 여기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곳, 이 시간에 대한 회고다.

오락은 오락이다. ‘썩소’를 날려라

어느 택배 노동자는 ‘죽음’으로 사회 현실을 알리고자 했다. 촛불들은 정부의 오만함을 꾸짖으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권력일 뿐이었다. 살고자 한 이들을 몰아내고, 고층 건물이 세워지면 투기가 판을 친다. 가진 자들의 횡포는 정부 정책으로 보호받고, 말하고자 하는 이들의 자유는 공권력으로 옭아맨다. 현실 사회의 부당함과 비이성과는 달리 드라마는 로맨틱하다. 예능프로그램은 순식간에 쏟아져 나오는 부조리와 권력의 ‘남용’으로 하나 둘씩 쓰러져 가는 우리네 일상의 절박함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 현실 정치에 대한 풍자와 조롱, 일주일 1시간씩이라도 모자라고 또 부족한 판국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너무 몰아붙이지 말자. 과하면 더 재미없는 법이니까.

‘오락’ 그 자체를 즐기자. 그리고 가끔씩 상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남자이야기>를 기자가, 그리고 재벌이 본다면 어떨까. <시티홀>을 시장과 정치인들이 보고 있다면 어떨까. <무한도전>과 <개그콘서트>의 ‘뿌레땅뿌르국’을 청와대의 그 분이 본다면. 뜨끔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즐겁고 유쾌한 무엇이 권력을 남용하는 이들에게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오지 않을까. ‘오락’ 그 자체를 즐기다가 ‘그 분’들을 떠올리며 한 번 쯤 썩소와 비웃음을 날려주는 여유가 ‘오락’을 보는 진정한 묘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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