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은 우리가 아주 흔히 듣는 관용구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송곳> 구고신의 명언을 여기다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본질은 자주 입장차라는 것에 의해서 훼손당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 입장차의 아전인수를 포기하고 남이 하는 불륜을 로맨스로 보려고 하고 있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이숙연 작가의 드라마 <공항가는 길>은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불륜을 다룬다. 비록 대한민국에서 간통죄라는 것이 사라졌고, 기혼자들에게 애인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비밀 아닌 비밀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공식적으로 불륜은 내놓고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역에 갇혀 있다.

KBS2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

그런데 1,2회를 통해 <공항가는 길>은 그 불륜이라는 간단한 단정을 완곡하게 말리고 있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로 우리네 감성을 적셨던 작가 이숙연의 첫 드라마였지만 침착하고 냉정한 톤 위에 배우들의 담백한 연기 그리고 인물들의 대사 속 감정을 찾아주려고 열 일 하는 보기 드문 연출까지.

자칫 불륜을 미화한다는 욕을 먹는 것이 두려워 글을 쓰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수작의 향기에 취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난한 집 뒤주 바닥을 긁는 심정으로 3회부터는 꼼꼼히 대사 한 마디, 동작 하나 그리고 연출의 의도까지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보게 됐다.

그러다가 최수아(김하늘)의 독백 같은 대사를 통해 이 드라마가 불륜이 아니라 그리움, 외로움 등 인간의 본연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는 작가의 고백을 듣게 됐다. 최수아는 마치 이차성징을 처음 겪어 화들짝 놀라고 겁내 하는 꼬마처럼 서도우에 대한 뭔지 모를 감정에 스스로가 혼란스럽다.

KBS2 수목드라마 <공항 가는 길>

“별일이에요. 미친 사람처럼 집안일하고, 일하고, 애 챙기고 쓰러져 자고. 그저 남들 다하는 먹고 사는 일인데 뭐가 이리 힘든지. 매일 이러구 살다가 비행 가서 어느 낯선 도시에서 잠깐 삼사십 분 정도 사브작 걷는데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복잡한 생각이 스르르 사라지고, 인생 뭐 별 거 있나? 잠시 이렇게 좋으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하아 다시 힘내게 되는. 그 삼사십 분 같아요. 동우 씨 보고 있음”

이 긴 대사를 백퍼센트 작가의 의도대로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한국 드라마에서 이렇게 평범한 단어들로 구성된 시적 대사를 만날 수 있음에 우선 기뻤다. 말을 하는데 자꾸 그림이 그려지는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된다. 낯선 도시에서의 짧은 산책엔 뭔가 외로운 그림이 그려진다. 외롭다 보면 그리움도 따라 짙어진다. 그리움은 내 몸 안에 숨어있던 설렘 세포들을 일하게 한다. 산책 같은 남자라니, 참 설레는 말이다.

그런데 최수아는 또 다른 다짐도 한다. 우연히 조종실에 들어갔다가 겪었던 개기월식을 떠올린다. 온몸이 타들어갈 것 같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개기월식의 경험. 서도우와의 인연은 그런 것이라 애써 다짐하게 된다. 그러나 개기월식은 최수아가 몰랐지만 그때 일어나기로 예정된 사건이었고, 짧은 시간에 벌어진 서도우와의 많은 일들은 누구의 계획에도 없던 일이다. 그래서 개기월식이 되기를 바라지만 결국엔 낯선 도시에서의 산책이 될 것이다. 산책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딱 최수아가 말한 그 산책의 그림까지만 보고 그 뒷장은 나중에 보기로 한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