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말 그대로 봇물 터지듯,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관련 '최순실게이트의 일각'이 드러났다. 아직까지는 빙산의 일각만 빼죽이 세상 밖으로 그 머리카락을 조금 드러났지만, 이번 국감 과정에서 꽁꽁 숨어있던 그 몸통이 드러날 수 있고, 그 몸통이 '최순실게이트'가 아니라 '박근혜게이트'로 전면화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박 대통령의 끔찍한 우병우 사랑, 정권말기 사정기관 장악을 위한 우병우 지키기, 대통령의 약점을 쥐고 있는 우병우 등등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온갖 평가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우병우는 몸통이 아니었다. 깃털이었을 뿐이었다. '한번 수석은 끝까지 수석'인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안종범과 사이비 교주 최태민과 더불어 '대를 이은 권력의 배후조정' 최순실의 머리카락마저 숨기려 한 청와대의 전략적인 '총알받이로서 우병우'라는 의혹이 사실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것도 지난주였다.

그래서 청와대는 국정감사가 박 대통령 집권 후 최악의 위기 현장이었을 것이고, 어떤 수를 쓰더라도 국감에서 최순실, 안종범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업갈취 의혹사건'은 덮어야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2016년 장·차관 워크숍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1번 타자로 기업갈취의 몸통으로 의심받고 있는 박 대통령이 나섰다. 지난 22일 박 대통령은 자신이 주재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런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두 재단에 대해 그간 제기된 의혹을 비방과 미확인 폭로로 규정했다. 물론 왜 비방이고 미확인 폭로인지에 대해 어떤 근거도 반박도 해명도 없었다.

이건 명백한 박대통령의 전술적 실수였다.

첫째, 박 대통령의 말마따나 좌파세력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에 이어 부패기득권언론 조선일보에서 멈추지 않고, 그간 청와대 비판에 대해서 약간 떨어져 있던 동아일보까지 포함시켜 보수언론 조중동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우를 범한 것. 동아일보가 22일자 논설위원 칼럼 <박제균의 휴먼정치, ‘좌파 세력’과 ‘기득권 언론’, 그리고 최순실>이라는 칼럼으로 박대통령과 최순실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마저 미확인 폭로성 발언으로 ‘사회 혼란을 가중시키는 신문‘이 돼버렸다.

둘째, 종편의 시사프로그램들이 22일 '비방과 폭로성 발언으로 사회 혼란 가중'이라는 박 대통령 발언이 나오기 전에는 두 재단에 관련된 안종범 최순실에 대해 방송 주제로 다루는 것에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엄청나게 몸을 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이 발언을 함으로써 '비방과 폭로'인지 여부를 토론에 부치게 한 결과를 낳았다. 이는 신문에서만 언급되던 내용이 본격적으로 방송으로 옮겨 들어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신문을 읽지 않는 국민들과 특히 50대 이상의 종편 주시청자들에게 '대통령의 기업갈취 의혹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장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들판으로 옮겨 붙는 불을 끄기 위해 광야를 향해 소리를 질렀으나 오히려 불을 끄는 것은 고사하고 광야를 태울 수 있도록 기름을 부은 꼴이 된 것.

이 상황에서 김재수 농수식품부 장관의 해의건의안이 국회를 통과한다. 경남 통영에서는 이런 상황을 일컬어 '똥개챤~스~'라고 한다. 하늘이 내린 기회, 천재일우의 기회를 청와대가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곧장 국회에서 싸우는 시늉을 내기 시작했다. 한국 현대정치사 최초의 구경거리였던 총리와 장관의 답변 필리버스터가 그것. 하지만 이 장면은 약간의 고민을 안겨주었다.

총리와 장관의 필리버스트가 김재수 장관을 지키기 위함일까하는 고민이었다. 그리고 쉽게 결론에 도달했다. 총리와 장관이 아무리 위로부터 '오더'가 내려왔다고 해서 그런 '역사에 길이 남을 추태 필리버스터'를 할 수는 없다는 것.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25일 밤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 열린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의결과 관련된 긴급 의원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그렇다면 다른 의도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야당의 포화가 최순실 안종범에서 박 대통령으로 옮겨갈 수 있는 상황에서 '제2의 우병우'로서 김재수를 총알받이를 내세웠고, 그 총알받기를 통해서 국회를 개점휴점상태로 끌고 가 지금 활활 타고 있는 '대통령의 기업갈취 의혹사건'을 잠시라도 덮어 시간을 벌려 하는 의도라는 의심이 생겼다. 이 의심은 적어도 나에게는 '합리적 의심'이다. 그 외 다른 가설로는 총리와 장관들의 역사적 추태이자 한국정치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이런 필리버스터를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벌기라는 가설을 중심에 두고 보면, 새누리당이 국회 본회의 차수변경 건으로 정세균 국회의장을 형사고발하며, 국회의장 사퇴를 요구하고, 국회 국정감사 보이콧을 선언한 것이 이해된다. 김재수 해임건의안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쉽게 마무리 될 수 있는 사안이다. 대통령이 해임시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한데 왜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국정감사 전면 보이콧을 새누리당은 강행하는 것인가. 그것도 야당도 아니고 집권여당이. 박 대통령의 소위 4대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사실상 마지막 국회에서.

지금 청와대는 진짜 ‘비상시국’일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최순실-안종범-박근혜'로 이어지는 '대통령의 기업갈취 의혹사건'을 일시적으로 덮고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한 시간벌기에 '올인'한 상황이며, 이를 청와대 진짜 정무수석인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입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대통령을 쓰러뜨리려는 음모’로 선전선동하는 것이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한시도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에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는 박 대통령. 이번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과정에서 나타난 기업갈취 의혹도 개인적인, 사사로운 일이 아닌 공적 일로 넘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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