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이 1000개나 나왔단다. 오늘 중앙일보 1면 톱이다. 중앙일보가 특히, 저질이지만 다른 일간지들도 엇비슷하다. 애써 그것의 원래 용도가 죽창이 아닌 추모 집회용 만장의 깃대라는 사실을 강조하진 않겠다. 단, 하나의 물건은 하나의 용도만 갖는다는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필요에 따른 쓰임이 있을 뿐이고, 그 필요가 어떻게 고조되느냐의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그 용도와 관련하여 딱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이런 대규모 집회의 경우, 집회 주최 측이 경찰보다 더 ‘선수’들이다. 집회의 진행과 이후의 파장에 대해 경찰보다 더 세심하게 기획, 예측하고 집회를 진행한다. 더군다나 ‘추모제’ 성격의 집회였다.

집회를 기획한 측은 집회 참가자 숫자에서부터 최종 동선까지의 모든 것을 충분히 사전에 고려했을 것이다. 관할 지역의 정보과 형사들도 바삐 움직였을 테고, 집회 현장에서의 교섭 시도도 활발했을 것이다. 많이들 착각을 하지만, 집회 주최 측과 경찰은 나란히 가는 존재이다. 집회 현장에서 경찰의 몫이 어디까지나 집회의 안정적 관리에 있다면 그렇다. 이미 허가된 집회 자체를 막는 것은 경찰의 임무가 아니고, 전경의 할 일이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하면 더욱 그렇다. 경찰의 집회 관리의 메뉴얼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범용 가능한 수준에서 정리, 전달되어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추모제’ 성격의 집회가 다른 집회와 분위기를 달리한다는 것은 집회에 서너 번만 참가해 본 대학교 1학년도 아는 상식이다. 경찰도 알고 기자도 안다.

그렇다면, 의심을 품어야 한다. 추모 집회용 만장의 깃대로 준비된 대나무의 용도가 죽창으로 변모한 까닭이 무엇인지 질문이 필요하다. 기자의 몫이다. 민주사회의 가장 기본적 권리인 집회에 악의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 중앙일보 5월 18일자 1면.
그런데 없다. 대부분의 일간지가 관련 소식을 다뤘고, 아예 ‘죽창’에 방점을 찍은 곳도 여러 곳이지만 없다. 왜 죽창이 아니었던 것이 죽창이 됐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러니 신문의 신뢰도가 곤두박질치는 것이다. 그나마 한겨레, 경향신문이 노동자들이 왜 집회를 했는지를 소상히 전했다. 하지만 부족하다. 모든 집회에서 깃대가 죽창으로 용도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당일 상황의 인과관계에 대한 완전히 적확한 설명은 아니다.

중앙일보 1면에 따르면, 이렇다. “사전 신고 되지 않은 구간에서 행진을 감행하려 하면서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과 충돌”했다는 것이다. 반쪽도 못되는 설명이다. 배고프니까 밥먹었다, 수준이다. 행진신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와 집회 참가자들이 왜 그 구간을 행진하려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면서 모든 충돌의 주체적 책임을 전적으로 집회 참가자들에게 귀결시킨 기술은 악랄하기까지 하다.

당일, 행진은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대전 중앙병원까지 ‘허가’가 났다. 민주노총은 대한통운 앞까지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이 불허했다. 그 ‘허가’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집회와 행진을 사전 신고제로 운영하며, 경찰의 의지에 따라 어떤 집회의 경우 태생적으로 불법 집회를 만들 수 있는 현행 제도에 있다. 그러나 그 문제에서 부터 짚자면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해야 하니 일단 차치하자.

토요일 충돌의 일차적인 이유는 중앙병원에서 1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대한통운까지의 행진을 허락하지 않은 경찰의 이상한 집회 허가에 있었다. 집회는 의사를 과시하기 위한 최후 수단적 성격을 갖는다. 대한통운이 어느 노동자의 죽음에 관한 명백한 책임이 있는 상황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대한통운에게 항의하려는 것은 당연한 행동양식이다. 이를 경찰이 의도적으로 막아선 것이다. 토요일 집회에서 만장용 깃대의 용도가 변모한 것이 바로 이 허가의 끝자리였던 중앙병원 앞에서부터이다. 책임이 대한통운에 있으니 대한통운 앞에 가서 책임을 묻겠다는 시위대의 논리적 귀결을 경찰이 원천적으로 제지하려 했던 과정이 충돌의 일차적 발발 이유이다.

동료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통함으로 범벅된 추모제, 토요일 시위의 기세가 사나우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앞서 말했다. 경찰의 임무는 시위의 안정적 관리라고. 이번 문제는 화물 노동자들과 대한통운 간의 문제이다. 기본적으로 경찰이 대한통운을 대리하여 노동자들과 맞설 문제가 아니었다. 근데, 경찰은 언제나처럼 대한통운 자본보다 앞서, 시위대를 맞았다. 대전 지역 언론인 <미디어충청>의 기사를 보면, 그나마 넓은 대한통운 앞 삼거리를 버리고 좁은 중앙병원 앞 거리에서 시위대와 맞섰다. 틀려먹었다. 책임자를 문책해야 한다. 애초부터 집회를 평화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런 선택이었다.

▲ 경찰은 중앙병원까지만 행진을 ‘허가’하고, 그 앞 좁은 도로에서 시위대와 맞섰다. 지형상 충돌할 경우의 상황이 격렬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미디어충청
앞서 말한, 토요일 집회 충돌의 이유와 그 토요일 집회를 촉발시킨 선행적 사실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출발은 30원 때문이다. 금호그룹 대한통운 화물 노동자로 일하는 택배기사들은 지난 1월 화물 1건당 수수료를 920원에서 950원으로 인상하기로 대한통운과 합의한다. 그러나 3월 대한통운은 일방적으로 인상이 불가하다고 통보한다. 그러곤 이에 항의하며 파업했던 78명의 택배 기사들을 일괄 해고한다. 화물 노동자 박종태씨는 힘없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로 내몰린 채 아무 힘도 써보지 못하는 절박한 심정을 어쩌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물론, 그 역시 자신의 선택이 세상을 바꿀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택배기사들의 부당한 노동 조건이 이야기되고 있으니, 세상은 그의 목숨 값을 완전히 허비한 것만은 아니다. 그의 동료들과 노동자들은 그의 죽음이 폭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행동에 나선다. 대상은 대한통운이다. 이 집회를 경찰이 막아선다. 통상적으로 대한통운 앞에서 진행되던 집회였건만 유독 토요일은 중앙병원 앞에서 막아선다. 누군가 대한통운 앞에 먼저 집회 신고를 했다는 이유였다. 당일 그 집회는 열리지 않았다. 집회를 방해하기 위한 허위 신고였다. 집회 주최 측은 재차 대한통운 앞에서 집회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현형 법률상 허위 집회 신고의 경우, 당일이라도 집회 허가를 내줄 수 있게 되어 있다. 집회 주최 측은 현장에서 경찰에 이를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경찰은 거부했다. 예고된 파행을 택한 것이다. 이 과정까지 언론은 일제히 침묵했다.

▲ 허위로 신고된 집회를 이유로 경찰이 집회를 불허한 대한통운 앞 사거리 사진. 상대적으로 넓은 지형이다. ⓒ미디어충청
그러곤 죽창에 대해서만 떠든다. 그 죽창이 추모제에서 흔히 쓰이는 만장용 깃대라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낫으로 앞을 날카롭게 절개한 죽창이 아니라, 슬픔을 매달기 위한 뭉툭한 봉이란 걸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 대나무는 집회 신고 품목이었다. 경찰도 알고 허가한 물품이었다. 그게 진짜 죽창이었다면 경찰이 허가했을까?

비통함으로 범벅된 집회란 걸 알면서도 애써 충돌을 택한 경찰, 30원의 값어치도 인정받지 못한 분노를 딱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참가자들의 손에 1000개의 대나무 봉이 들려있음을 알았음에도 좁은 길에서 그들과 육박전을 택한 경찰. 그러곤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집회를 불허하겠다는 알량한 경찰. 진정, 민주사회의 적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민주노총과 화물노동자들인가, 죽창인가? 아니다. 분노를 역이용해 함정에 빠트리는 경찰이다. 어쩔 수 없이 전투경찰이 되고 만 젊은이들을 자본의 방패로 활용하는 사회이다. 그리고 이 모든 총체적 진실을 두고, 기어코 자신의 입맛만 챙기는 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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