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박쥐>가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예전 같으면 언론은 본선 진출만으로도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이젠 그랑프리 정도는 먹어야 아드레날린을 분출한다. 그만큼 한국영화의 위상이 높아졌다. 90년대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역설적으로 80년대 <애마부인> 계열의 ‘방화’가 밑절미가 됐다. 애마부인 연작은 성애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저항을 포기한 영화계의 음울한 엑소더스였다. 표현에 대한 욕망은 지각 아래에서 에너지로 다져졌고, 때를 만나 지각 위로 솟아 폭발하듯 꽃을 피웠다.

TV 시사 다큐멘터리가 연성화한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가장 지배적인 현상은 탈정치화다. 시사교양프로그램의 잇단 스포츠 스타 성공기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소재가 부적합하거나 의미 없진 않다. 그러나 시청자의 소구를 단순 추종하는 상업화 경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특히 논쟁적 소재를 피해가려는 자기검열을 경계해야 한다. 어려운 이웃의 삶을 전하면서 대통령 부부의 소소한 선행을 집중적으로 다룬 프로그램이 연초에 나오기도 했다. ‘탈정치’와 ‘정치적 투항’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방증이며, 표현의 자유에 관한 병증이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지율 스님은 “방송사들이 지금 4대강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왜 기록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했다. 저널리즘에서 가장 선행하는 행위는 ‘기록’이다. 언제 어떻게 보도하느냐는 그 다음이다. 가치중립적으로 표현해, ‘4대강 정비사업’은 한반도 물길에 관한 전례 없는 거대 공간 프로젝트다. 그 현장에 방송사 카메라가 없다는 것은 훗날 이 사업을 평가할 때 ‘현재’와 비교할 수 있는 ‘과거’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얘기다. 박지성이나 김연아의 당시 모습과 4대강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영화관이 애마부인 연작으로 연명하던 시절은 ‘3S’(섹스/스포츠/스크린)의 시대였다. 3S는 엑소더스이기도 했지만, 전두환 독재정권에 의해 음으로 양으로 권장되던 것이기도 했다. 3S가 열어놓은 자유지대는 정작은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처럼 거대한 감옥이었다. 그 시절 여배우 안아무개의 가슴이 어떻다는 둥 잡담을 했지만, 현실의 위안은 될 수 없었다. TV의 시사 다큐멘터리가 연성화하고, 시대사적 현장을 방송사 카메라가 알아서 외면한다면 이 사회의 표현의 자유와 저널리즘 수준은 머잖아 애마부인 시절로 퇴행할지도 모른다.

그럭저럭 버티다 보면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영화처럼 닥칠지 모르겠지만, 그런 꿈은 아큐의 누추한 정신승리법에 다름 아니다. 영화와 저널리즘은 분명 다르다. 픽션의 비극은 카타르시스에 가닿지만 현실의 비극은 비극에서 끝난다. 돌이킬 수도 없고, 다른 걸로 메울 수도 없다. 저널리즘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40호(2009-05-18)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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