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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선거적(超選擧的) 요소’라는 개념이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인 허버트 쉴러의 표현인데, 사회적 모순은 선거와 같은 정치적 상황이나 통치의 변모가 아닌 사회 밑바탕에 존재하는 고유한 특성에 의해 존재한다는 견해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열 번이 넘는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주당과 공화당이 지속적으로 정권을 주고받으며 정책이나 정치 철학이 한 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보인 적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일상은 변하지 않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선거에 영향 받지 않는 연속적인 미국사회의 고유한 단면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초선거적 쟁점은 대개 ‘문화적’인 것들이다. 미국사회에선 ‘낙태’, ‘총기’, ‘동성애’, ‘마리화나’ 같은 것들이다. 인식의 지평이 정체되는, 사고가 진전하지 않는 답습의 모습이다. 시쳇말로 문화적 ‘간지’의 후진성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초선거적 쟁점들은 무엇일까? 미국만큼이나 보수적인 사회이니만큼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문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의사가 하지 않는 한, 현행 법률적 판단에서 모든 문신은 불법이다. 그렇다고 의료법에 문신이 불법의료행위라고 적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축적 되어 온 법원 판례가 그렇다. 당신이 만약 문신을 받는다면, 의사에게 가겠나? 전문 타투이스트에게 가겠나? 당신이 알고 있는 어떤 멋진 문신은 의사가 한 것일까? 이 명확한 문제를 우리 사회는 수십년째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문신의 문제는 신체를 둘러싼 우리사회의 초선거적 요소, 문화적 쟁점들이 확고부동함을 보여준다. 미디어를 장악하고 있는 국내외 프로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들에게 문신은 봉인을 풀고 나름대로의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문신에 대한 실제적 차별과 현실적 편견의 벽은 또한 여전히 강고하다. 나만 해도, 등짝의 문신 때문에 목욕탕에 가면 따가운 불신의 눈초리를 느낀다.
한국사회의 지긋지긋한 완고함이란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넓고 깊다. 사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귀 뚫은 남자는 딱 변태 취급이었다. 머리를 염색하면 방송 출연이 불가하던 시절이 2000대 초반이었다. 지금 들으면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채 10년 전만 해도 그랬다. 그렇다고 많은 것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여전히, 귀를 뚫은 고위 공무원은 없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대기업 부장님이나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출근하는 여자 선생님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한 사회의 지배 문화, 주류적 질서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문화란 유연하되 강고한 습관이고, 유기적이되 고정적인 질서이기 때문이다. 문신은 한국 사회가 갖는 이중성의 상징적 기호이다.
우리 사회에서 문신은 특정한 세대에겐 인정할 만한 취향 문화(taste cultures)로 자리잡고, 일부 소비문화의 영역에선 적극적으로 장려되고 있기까지 하지만, 일상의 영역에선 철저하게 금기시되어 있다. 여전히 사회적 금기의 대상이고, 문신이 각인된 몸은 지극히 불온한 인간으로 규정되며, 문신의 시술 과정은 매우 위험한 불법 행위일 것 같다는 막연한 편견은 계몽되지 않는다.
문신은 근대화 이후 수행된 몸에 대한 국가적 억압과 사회적 통제의 집약적 문제이다. 한국 사회에서 문신은 다양한 역사적, 동시대적 의미를 거세당한 채, 오로지 ‘조직 폭력’, ‘병역 기피’, ‘불법 시술’, ‘망가진 신체’ 등의 부정적 코드와 상징체계로만 인식되어 왔다. 유교적 신체관이라고 하는 전통적 관습이 현대를 억압하고 자기 검열을 유도하는 사회적 통제로 활용되는 방식이었다. 효경에서 공자가 말했던,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는 다양한 변주를 거쳤지만, 어쨌든 지배력을 잃지 않고 있다.
‘순응’과 ‘적응’을 장려하는 관습, 관행, 습관, 가치관 같은 것들이 우리 몸에 함축되어 있다. 그 몸들이 모여 다시 사회가 구성된다. 모든 사회적 존재는 위계와 권력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혹은 살아낸다.)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그것은 오랜 시간이 빚어낸 시간적 본능이며 이탈할 수 없는 공간적 숙명이다. 몸은 거스를 수 없는 그 자체이다. 몸은 모든 권력과 관계가 관통하여 의미를 발생시키는 복합적 기호이다. 경박하게 여겨지는 ‘몸짱’은 그래서 결코 허술한 권력이 아니며, 그렇게 몸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권력을 이어가는 수단이다.
사회 각 분야, 부문을 법률과 정부가 단속하는 시대는 지났다. 문화의 영역은 특히 더욱 그러하다. 그동안 문신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실제적’이라기보다는 여러 단계 의지와 목적의 개입을 거친 ‘조합물’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조폭의 등짝을 범죄의 근거로 활용해 온 미디어에 있다. 당연히, 누구나 문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문신은, 어떤 개인의 일탈적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탈은 국가적 관리 영역, 대상이 아닌 그야말로 개인적 선택의 자유문제이다.
몸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이자, 궁극적 공간이다. 문신을 통해 신체의 자기 결정권을 국가로부터 되찾는 것은 획기적인 경험이다. 오늘, 문신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가장 급진적 쟁점이다. 문신은 순응과 굴종, 평범과 보통을 미덕으로 살아 온 우리에게 아직은 낯설고 불편한 영토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 낯섦과 불편 자체를 우상으로 껴안고 살 순 없지 않은가? 다카기 아키스미가 쓴 <문신살인사건>의 첫 문장으로 끝내겠다. “문신의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드물다. 살갗에 은밀하게, 감춰진 생명을 새기는 문신예술의 진가에 감동을 받는 사람의 수는 결코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