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 뭐가 없잖어. 푸석한 모래밖에는 없잖어. 소들은 굶어죽게 생겼잖어. 되돌아 갈 수도 없잖어♬”

뉴라이트성향의 방송개혁시민연대가 지난 14일 출간보고회를 개최한 책 <좌파정권 10년 방송장악 충격보고서>를 보고, 장기하와 얼굴들 1집 ‘별일없이 산다’에 실린 ‘아무것도 없잖어’라는 노래가 뇌리를 스쳤다. 시대착오적 언어, 엉성한 논리와 비방, 신념에 찬 구호…. 한마디로 뭐 별로 볼 게 없다.

방개혁은 출판보고회를 앞두고 “전현직 방송인들의 입을 통해 좌파정권 10년동안 벌어진 방송과의 커넥션을 폭로하겠다”며 한껏 벼렀었다. 과연 어떤 폭로가 나올지 궁금했던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MBC KBS 전현직 방송인들의 충격고백’이라는 굵은 글씨가 보여주는 당당함과 붉은 핏방울의 화려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표지와 달리 내용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방송사=좌파=척결대상’이라는 단순 또는 무식한 전제 위에서 시종일관 비판이 아닌 비방을 한 이 책은 속된 말로 좀 ‘구리다’.

“좌편향의식 프로그램을 방송하여 체제비판, 체제전복의 메시지를 끊임없이 주입했다” “수적천석의 좌파매체 전략을 통해 시사, 교양,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방송 프로그램이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한 좌경화 사상교육에 사용됐다”…. 이게 대체 어느 시절의 언어란 말인가. 신념에 가득찬 문장들은 마음에 와닿지 않고 거북하기만 하다.

책은 크게 ‘좌파시대의 개막, 김대중 정권과 방송’ ‘노무현 정권과 방송의 밀월시대’ ‘노무현을 지켜라-탄핵규탄 특별방송’ ‘언론노조-미디어오늘-언개련-MBC, 언론계 좌파커넥션의 조작 음모’ ‘전 국민에 대한 좌파 사상교육’ ‘MBC 그들만의 밥그릇 지키기’ ‘뇌물과 성추행으로 얼룩진 방송인 백태’ 등 총 7장으로 나뉜다.

그런데 이상하다. ‘MBC KBS 전현직 방송인들의 충격고백’이라는 말과 달리 책에는 저자가 따로 적혀있지 않다. MBC, KBS에 재직했던 전현직 방송인들은 대체 누구일까? 임헌조 방개혁 공동대표는 <미디어스>와 통화에서 “김강원 대표를 비롯한 전현직 방송인 10명이 공동 집필했다. 이들이 누구인지는 밝히기 어렵다”며 “내용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썼으나 전직에 계신 분이나 현직에 계신 분이나 책 내용이 시비에 휘말릴 경우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라 판단해 김 대표가 앞장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방개혁 개인 발기인에 포함된 전현직 방송인들이냐”는 물음에 “그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여전히 실체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다.

‘노무현 시대의 대표적인 이념프로그램’이라는 KBS드라마 <서울 1945>에 대해 방개혁은 이 드라마에 대한 평론이라며 <KBS 드라마의 ‘반역좌익 미화’> 전문을 전재하는데, 이 역시 누가 쓴 건지 나와있지 없다. 저자 명기는 기본 아닐까?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보니 프리존뉴스의 필진이라는 ‘강철군화’가 지난 2006년에 작성한 것이다. 이곳 기자들은 아침에 “안녕하세요” 보다 “북진” “멸공”을 외치며 출근을 한다는데 이 책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방개혁은 각종 굵직한 근현대사 이슈를 다룬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대해 “1999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30회 이상 각종 언론부분에서 수상하는 이변을 낳았다”며 “100% 좌편향 이념전파 프로그램인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기간 중 기업, 시민단체, 정부기관, 방송사, 여성단체, PD협회 등 사회 각분야의 좋은 프로그램상을 휩쓸게 된 것은 양대 정권기의 좌경화된 사회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지적한다.

▲ ‘좌파정권 10년 방송장악 충격보고서’ 브리핑 도중, 객석의 몇몇 사람들이 졸고 있는 모습 ⓒ곽상아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설명없이 “좌편향 비율 100%”라는 명쾌한 분석(?)을 내리며, 각종 상을 휩쓸고 호평을 받은 프로그램을 비방하는 것의 이면에는 ‘한국 현대사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삶을 조명하는 것은 무조건 좌편향이며, 좌편향은 무조건 나쁘다’는 진부한 전제가 깔려 있다. 방개혁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좌파와 좌파 아닌 것 두 가지로 분리되는 모양이다.

방개혁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2007년 방송3사들이 현지 생방송, 연장 편성 등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특집을 집중적으로 내보낸 것에 대해 “한국의 방송사들이 온통 북한모습을 안방 시청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노출하여 현실 속의 휴전선을 망각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 속의 휴전선을 언제나 마음속에 담아두고 두주먹 불끈 쥐어야 되는 것일까.

또 탄핵당시 방송3사가 긴급편성, 특집편성을 통해 이를 집중 보도한 사실을 지적하며 당시 PD연합회가 회원인 방송사 PD 317명을 대상으로 한길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신뢰수준 95%, 표본오차 5.5%)를 거론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의결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90.5%가 “잘못된 일”이라고 답했고, “이번 총선에서 어느당 후보를 지지할 것이냐”는 물음에 53.9%가 열린 우리당을 선택했으며 한나라당을 꼽은 이가 2.5%에 그쳤단다. 이에 대해 방개혁은 “탄핵방송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PD들의 생각은 당시 탄핵방송의 성향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가늠자가 될 것”이라며 “이 조사에서도 밝혀졌듯이 탄핵방송을 통해 노무현 정권과 방송노조, 특히 PD와의 밀월 관계가 더욱 극명하게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을 좋아하는 PD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어찌하여 ‘PD와 정권의 밀월관계 증명’이라는 결론으로 도출되는지 책만 보면 도통 알길이 없다. 당시 국민여론조사 결과는 어땠으며, 탄핵에 반대한 국민 가운데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 후보들을 선택한 국민은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지에 대해서도 말이 없다.

방개혁은 아는지 모르겠다. 방개혁은 MBC에 대해 “좌파 시민언론운동 대표격인 김중배 사장 임명후 가히 김대중 방송이란 말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상 초유의 지역 인사를 통해 방송을 완벽히 장악하게 된다”며 호남출신 MBC 직원들을 지적하는데 리스트 중에 방개혁 발기인 중 한곳인 MBC공정방송노조의 정수채 위원장도 끼어있다는 것을. 전북 출신인 그는 당시 시사교양국 부국장이었다.

이밖에도 책에는 MBC, KBS를 비롯해 SBS의 각종 프로그램 편성 변경까지 ‘좌편향’이라고 지적하며 “이것이야 말로 방송의 언론장악”이라고 강변하는 내용이 가득차 있다.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른다’는 수구(守舊)라는 단어를 욕보이는 듯하여 미안하지만 책은 다분히 ‘수구꼴통’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MB정부 탄생에 큰 역할을 한 뉴라이트. 정부와 어깨를 함께 하는 이들의 지적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면 지금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한 대통령이더라도 이 나라의 앞날은 어두워 보인다. 그런데 아마도 이런 나의 걱정은 (저들이 보기에) 내가 ‘좌파 정권에 세뇌된 젊은 세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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