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당선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그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다른 정치를 기대했기 때문이리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받는 가장 큰 비판은 국가를 사유화했다는 거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니라 늘 나라를 활용해 자신의 잇속을 챙길 생각에 골몰하였다는 게 반대자들이 갖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전형적 이미지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 집안’에서 자랐고 10·26 이후에도 공적 활동과 무관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인생 전체를 통틀어 몇 년 정도를 제외하면 어찌됐건 공적인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듯 보였던 거다. 계산에 밝아 사익을 챙기는 이명박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 대통령과 영부인이었던 부모를 흉탄에 잃은 박근혜를 선택하자는 게 이런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박근혜 지지 심리’다.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관은 공적인 것에 삶의 모든 것을 거는 게 아니라 ‘공적인 것’을 ‘나’로 대체하고 공사를 구분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는 게 드러나고 있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이익이 공익이다. 공익(사실은 대통령 본인의 이익) 추구를 위해서는 제도나 규정, 사회적 상식 등은 얼마든지 어길 수 있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그리고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씨 관련 의혹의 사례에서도 이런 측면이 드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난무하는 비방과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들은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결국 두 재단을 둘러싼 의혹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문제될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정경유착’과 ‘비선실세’ 의혹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 권력이 책임을 남에게만 돌려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건 명백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안종범 정책조정수석과 우병우 민정수석이 보인다. (연합뉴스)

언론은 최순실 씨를 권력의 ‘오장육부’니 ‘비선실세’니 하는 말로 지칭하며 온갖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에 ‘비선’은 있을지언정 ‘실세’는 없다. ‘실세’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는 최순실 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를 따져보면 드러난다. 그러자면 이 두 개의 재단에 대해 왜 하필 ‘재단’인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정치권은 ‘일해재단’에 비유한다. 퇴임 이후를 대비하기 위한 걸로 추정된다는 점에서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동시에 보아야 할 것은 ‘육영재단’의 사례다.

육영재단은 1969년에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했다. 10·26 이후 육영재단은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이 물려받았는데, 재단 운영에 문제의 최태민 목사 일가가 상당히 개입했던 게 문제가 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는 1990년에 박근령, 박지만 씨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최태민 목사로부터 언니(박근혜 대통령)를 구해달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보내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육영재단의 경영권을 동생인 박근령 씨에게 넘겨야 했다.

최태민 목사는 육영수 여사 피살 이후 ‘구국봉사단’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부터 실무를 보좌한 걸로 알려져 있다. 최태민 목사의 딸인 최순실 씨가 1980년대 중반 육영재단 부설유치원의 운영을 맡았고 그의 남편이었던 정윤회 씨가 ‘육영재단 박근혜 비서실장’이란 직함의 명함을 들고 다녔다는 보도 등을 종합해보면 이 시기 육영재단의 운영 전반을 최태민 목사 일가가 좌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서술한대로 박근령 박지만 남매가 최태민 목사 일가를 ‘탄핵’하였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 최태민 목사 일가는 혈육보다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90년 이후 7년 간의 공백을 겪는데, 본격적인 정치 입문 이후에도 정윤회 씨가 비서실장을 자처하며 입법보조원 등으로 활동하였다는 점,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비서 4인방(대선 기간 동안 1명이 사망해 현재는 ‘문고리 3인방’이 된)이 이 시기 구성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최태민 목사 일가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보좌’는 계속 이어졌던 걸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서전과 인터뷰 등에서 인간에 대한 불신감을 토로하며 <동물의 왕국>을 즐겨본다고도 밝혔는데, 이 기준에 따르면 최태민 목사 일가의 ‘충성심’은 인간의 것을 넘어 동물의 경지(?)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순실 씨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구성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는 게 사실이라면 1990년 이전 육영재단 체제의 부활을 연상할 수밖에 없다. 과거 육영재단은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건설하고 어린이 잡지인 <어깨동무>와 <만화보물섬> 등을 발간하였으며 여러 교육 관련 사업을 추진하였다. 여기서 ‘어린이’와 ‘교육’을 ‘문화’와 ‘체육’으로 바꿔보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대략적인 구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대통령은 5년 임기지만 이런 식의 사회사업은 정해진 기간이 없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이 퇴임 이후 구상과 관련이 있다면 박근혜 대통령 인생 전반의 손발이 되어줬던 최태민 목사 일가, 즉 최순실 씨가 반드시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청와대의 이른바 ‘순장조’ 역시 자연스럽게 활동 영역을 이쪽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게 된다. 대표적으로는 ‘문고리 3인방’이다. 야권은 박근혜 대통령이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정무적 판단’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병우 수석이 이 재단들의 설립 배경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는데, 앞의 맥락으로 보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판단일 수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수세에 몰려 우병우 수석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퇴임 이후에도 써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지키고 있는 거라는 판단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은 우병우 수석의 발탁에도 최순실 씨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는데, 이는 최순실 씨가 어떤 면접이나 인사검증 성격의 일을 했다기 보다는 우병우 수석이 ‘순장조’ 혹은 이른바 ‘패밀리’의 일원이 됐다는 점을 지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이 20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서 김현웅 법무부 장관의 답변을 듣던 중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정황들은 우병우 수석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지지부진한 것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우병우 수석 처가 부동산 거래 의혹이 제기된 지 2달 가까이 지났지만 검찰은 이번 주 정도에야 김정주 NXC 회장을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해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우병우 수석과 넥슨 사이에 ‘다리’를 놓아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진경준 검사장과 우병우 수석 아들의 보직특혜 의혹의 관계자인 이상철 서울경찰청 차장도 조만간 조사를 받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검찰 특별수사팀이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걸로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병우 수석 처가의 화성 땅 문제도 차명 소유주의 행방이 불분명해 수사에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우병우 수석 수사가 진척이 안 되니 이석수 특별감찰관 수사 역시 성과가 없다. 조선일보 기자와 MBC 기자가 검찰 출석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사표 수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어정쩡한 출근을 하는 상태다.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권력의 정치적 구상과 나라의 이익이 충돌할 때 지도자는 국가를 우선시할 수 있어야 한다. 검찰이 권력을 수사하지 못하고 정치권이 소모적 대결을 반복하는 건 대통령이 잘못된 정치적 구상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이 상태가 이어질 경우 검찰 조직이 온전히 남아날지 의문이다. 이대로 가면 박근혜 대통령 퇴임 이후 두 재단의 설립 과정에 대한 문제가 또 다시 정치적 공방이 되리라는 점은 명약관화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익’을 본인의 이익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인식을 버려야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지도자를 잘못 선출한 피해가 이렇게나 크다. 국민은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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