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문제로 정국이 요동친다. 대정부질의에 나선 야당 소속 의원들은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청와대에서 공직기강비서관으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는 조응천 의원이 이에 가세하면서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다. 재단의 설립 과정에 대한 의혹에서 시작된 불길이 ‘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으로 옮겨 붙는 느낌이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문제는 상당 기간 ‘지라시’ 등을 통해 돌던 이야기인데,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관련 정국에서 TV조선이 보도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당시 함께 보도된 건이 새누리당 내 친박 실세들과 청와대 정무수석의 부당한 공천 개입 의혹이다. 즉, 조선일보사의 입장에서는 정권과 여당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찌르기 위해 꺼낸 소재인 셈이다.

청와대가 조선일보와의 힘겨루기에서 판정승을 거둔 후 이 문제는 다시 잊혀지는 분위기였는데 20일 한겨레 보도로 논란에 다시 불이 붙었다. 한겨레가 TV조선이 사실상 언급하지 못한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 씨 문제를 짚었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해당 보도를 위해 특별취재팀을 따로 꾸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최순실 씨의 이름이 이 문제와 관련해 공식적으로 언론 매체에 등장함으로써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논란은 정권 차원의 문제가 됐다.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혹은 이미 지난 2014년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에서도 불거졌다. 최순실 씨는 이혼한 정윤회 씨와의 사이에 자녀를 두고 있는데, 이 딸이 승마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한 이후 과정에 대한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최순실 씨의 딸이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자 청와대의 지시로 문화체육관광부 업무 담당자 2명이 경질됐다는 거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나쁜 사람들’이란 단어까지 썼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 맥락을 보면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문제의 핵심은 간단해 보인다. 청와대를 비롯한 대통령의 측근 및 참모들이 전경련을 매개로 대기업들에게 ‘알아서 성의를 표하도록’ 하고 수상한(?) 자금을 조성한 것이다. 한겨레 등의 보도에 의하면 이 재단들의 정관과 창립총회 회의록은 형식과 내용이 매우 유사하며 그마저도 허위로 작성돼있다고 한다. 시쳇말로 하면 한 사람이 ‘가라’로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회의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하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 것으로 돼있는데, 장소의 문제는 최소한의 양해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볼 때 이 과정에 전경련이 개입했다는 의혹 역시 제기해볼만 하다. 회의록에서 총회가 열린 장소를 전경련 유관 장소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허위 서류들의 양식과 내용에 다소 성의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경련도 오로지 자의에 의해 이 일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TV조선 보도 등에서 안종범 정책조정수석이 언급된 것을 볼 때 이 과정에서 청와대에 으해 일부 대기업들의 ‘민원’이 해소된 정황이 있음은 물론이다. 여기까지만 봐도 ‘정경유착’이란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조성된 자금을 어디에 쓰려고 했느냐의 문제이다. 제기되는 다양한 의혹을 종합하면 결국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위한 것 아니겠느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일해재단’이 언급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당시 일해재단은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여러 목적과는 다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임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위한 것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1952년생이다. 대통령직을 마치면 67세다. 다른 정치인 같으면 대통령에 도전할 수도 있는 나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1953년생이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심지어 1944년생이다. 최근 정계복귀를 공식 선언한 손학규 전 의원은 1947년생이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퇴임을 하더라도 대구경북 지역에서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위치에 있다. 대통령직을 끝으로 모든 공적 활동을 마무리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정치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대통령 퇴임 이후 정치’에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한데 말하자면 ‘구실’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대통령까지 지낸 인물이 다시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 선거에 출마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그럴듯해 보이는 게 문화와 스포츠다. 본격적인 정치와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도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재벌 총수들이 올림픽 유치 등을 위해 일부러 노력한 사례 등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물론 이런 추측들은 아직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에 있다. 그럼에도 진지하게 제기할 수밖에 없는 문제는 문화와 스포츠가 기만적 통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내세운 국정기조 중 하나는 ‘문화융성’이다. 당시 이는 여러모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짐과 동시에 ‘창조경제’가 포괄하는 지식콘텐츠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실제로 ‘문화융성’을 위해 한 일들을 복기해보면 이게 그저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하였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이 정권의 문화체육관광부는 정책적 아젠다를 주도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사를 둘러싼 논란의 진원지로 취급돼왔다. 앞서 언급한 승마협회 문제나 유진룡 전 장관의 석연찮은 경질, 김종덕 전 장관과 같은 대학 출신의 인사 독식 의혹 등이 다 마찬가지다. ‘크리에이티브 코리아’를 둘러싼 의혹은 또 어떤가. 문화나 체육이 이 정권에서 ‘자리’나 ‘금고’ 이상의 존재 의의를 과연 가지긴 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앞서의 도식으로 볼 때 애초에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융성’을 내세운 것 자체가 퇴임 이후 어떤 구상과 맞물려 있었던 게 아니냐는 추측을 제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만일 그렇다면 ‘문화융성’은 퇴임기조라면 모를까 국정기조라고 말할 수도 없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답답한 것은 이런 식의 기만적인 국정운영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반복되고 있고, 이는 결국 대통령의 현실인식으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직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세월호가 가라앉아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재난에 대비하겠다며 만든 국가안전처는 지진이 나도 별다른 하는 일이 없어 밥이나 축내는 군식구와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이제는 공무원들도 대통령의 본질을 알아버렸는지 각 부처가 내놓는 현안에 대한 대책이나 업무보고 등은 재탕 삼탕에 말만 번지르르한 있으나 마나의 내용들로 채워지고 있다. 가계부채 대책이나 조선 해운업 구조조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 대한 이런 저런 비판이 나올 때마다 남 탓을 하기 바쁘다. 현직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퇴임 이후엔 무슨 일을 하겠는가. 혹시라도 이상한 이름들의 재단 문제가 퇴임 이후 구상과 관계된 것이라면 이쯤에서 그냥 포기하고 원칙대로 수사해서 관련자들을 사법처리하는 게 낫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이번 사태를 두고 “옛말에 사람이 지나가면 발자국이 남는다고 한다”고 했다. 다음 정권에서 이 문제가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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