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치가 명절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이때에 서로 떨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여 정치적 의견을 교환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선 1년 전 추석부터 이어지는 명절은 이후 대권 구도 형성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번 추석에 대해서도 이런 관점에 의한 평가가 오간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추석 이후 여론이 보수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계기는 북한의 5차 핵실험이다. 이른바 ‘안보이슈’는 이전까지 추석 밥상 여론을 좌우할 것으로 보였던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나 대우조선해양 관련 문제를 밥상 바깥으로 밀어냈다.

여론조사전문업체 리얼미터가 국민일보 의뢰로 18일 실시한 여론조사(전국 성인 1020명 대상, 스마트폰 유무선전화 혼용 RDD 및 RDSP방식 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1%p, 중앙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과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모두 소폭 상승했다. 여러 악재 속에서도 보수정치의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추석 직전에 경주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이 지진에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큰 문제로 지적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북한의 핵실험은 보수층의 결집이 상당한 수준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추석 직전 북한 핵실험에 대한 대응수위를 “김정은의 정신상태는 통제불능”이라는 말까지 동원하며 최고조까지 올렸던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여론이 이렇기 때문인지 그간 원내교섭단체를 이루고 있는 주요 3당 중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해 가장 강경한 반대 목소리를 내왔던 국민의당도 입장을 바꿀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는 보도도 이어지고 있다. 국민의당의 입장 변화가 여론의 보수화를 보여준다는 해석은 당연한 얘기다.

여론의 보수화를 부채질 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이제부터 일어날 국정 운영의 실패가 오히려 현 정권에 대한 평가보다는 차기 정권에 대한 성격 규정의 맥락에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경주 지진 대응 실패와 같은 경우 박근혜 정권에 제대로 된 대응을 요구하기보다는 차기 정권이 이런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차기 정권에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요구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차기 대권에 대한 추석 민심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대통령감이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서슬 퍼런 철권통치(?)덕에 여당은 제대로 된 대권 주자를 세우지 못하고 있고, 야권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뭔가 미덥지 않은 대세론을 이어가는 가운데 나머지 주자들이 일종의 ‘도토리 키재기’와 같은 경쟁에 들어간 형국이다.

미국을 공식방문중인 정세균 국회의장과 여야3당 원내대표들과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15일 (현지시간) 뉴욕 UN 본부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정세균 의장, 반기문 UN 총장,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연합뉴스)

그러다보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행보에 눈이 쏠린다. 주요 언론은 이번 추석 연휴 동안 뉴욕을 방문한 정세균 국회의장 및 주요 3당 원내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내년 1월 중순에 귀국하겠다고 발언한 사실을 보도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을 떠받드는 친박 세력이 상정하고 있는 대권전략의 핵심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와 기존의 지지기반인 대구경북(TK)지역의 연합을 통해 충청-호남-TK 연대론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기문 대망론’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권 주자들 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장기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핵심 근거로 한다. 여기에 친박들의 구체적 전략 전술까지 언급되는 상황이니 ‘차기 정권’에 대한 기대가 쏠릴 수밖에 없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북핵 등 현안 문제에 보다 진전된 입장을 내놓고 김종필 전 총리가 “결심한 대로 이를 악물고 하라”는 메시지로 ‘지원사격’에 나선 것은 이런 기대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대통령감이 없다’는 평가가 변하지 않는 것은 정치의 역사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앞날을 긍정적으로만 점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처럼 정치에 대한 수미일관한 비전을 내놓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은 인사가 한순간에 몰락하는 현상은 늘 있는 일이다. 더군다나 외교관 신분으로 유엔 사무총장까지 간 사람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검증’이 시작되면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도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모색하는 ‘플랫폼 정당론’은 이런 현실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전 대표는 1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주요 인사들이 당적을 버리고 제3지대에서 정치세력화를 도모할 경우 전향적 입장을 가질 수도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는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이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 언급한 ‘플랫폼 정당론’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언론은 국민의당의 이러한 전략을 1차적으로 더불어민주당 손학규 전 의원이나 정운찬 전 국무총리 등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안철수-손학규-정운찬 등 대권주자들 간 정계개편이 현실화될 경우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도 미지수다. 세 사람 모두 ‘정치 교체’를 말하기에는 기성 정치에 매몰돼있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론이 보수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시도들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국민의당이나 ‘제3지대 운동’ 등이 내세우고 있는 ‘제3세력론’은 여론의 보수화를 근거로 한 ‘중도화’ 전략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여론의 보수화는 정치적 냉소주의를 동반하고 있다는 점을 간파할 필요가 있다. 진보냐 보수냐 중도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어떻게 움켜쥐느냐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기민하게 움직여야 할 것은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전 대표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전 대표 측은 ‘정중동’의 자세를 고수하며 ‘대세론’을 유지해가는 걸 주요 전략으로 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그러나 대세론의 유지는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문재인 전 대표가 우려해야 할 가장 큰 난관은 오히려 ‘반기문 대망론’이 조기에 무너지는 것일 수 있다. 너도 나도 대권주자로 나서고 본격적으로 인물경쟁이 심화되면 오히려 콘텐츠가 평가의 핵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콘텐츠의 측면만을 본다면 ‘따뜻한 보수’나 ‘모병제’와 같은 슬로건 및 정책 이슈를 선점하고 있는 새누리당 소속 인사들이 강점을 보이고 있다.

보수화된 여론에 대응하는 방법은 ‘중도화’라는 포지션의 문제, 즉 형식에서 찾을 게 아니라 이슈와 콘텐츠의 차원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추석 이후 정국이 내년을 좌우하게 되는 만큼 야권에 속한 대권주자들의 분발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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