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국 영화는 그동안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대적인 배경 자체가 너무 암울한 탓도 있었지만 소재나 스토리 라인, 또는 표현법 등이 관객의 구미를 사로잡지 못한 이유도 컸었다. 그러나 지난해 최동훈 감독의 '암살'은 자신의 장기인 케이퍼 무비에 독립군이라는 소재를 입혀 천만 관객 이상을 동원했고, 주연배우 전지현의 흥행가치를 더욱 드높였다.

'암살'에 이어 올해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독립군의 저항을 소재로 한 영화가 다시 선보였다. 최동훈 감독과 더불어 국내 명품감독 계보에 올라와 있는 김지운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밀정'이다.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오달수, 조진웅 등 초호화 캐스팅이 돋보였던 '암살' 못지않게 '밀정'도 송강호, 공유, 한지민 그리고 특별출연 이병헌이라는 특급 캐스팅을 통해 관객의 관심을 모은다.

'밀정'은 친일 행각을 펼치던 조선인 경부가 독립군 단체인 의열단의 핵심인물들을 체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가 오히려 역으로 이중첩자 제안을 받는다는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선보인다. 추석 시즌 보기엔 다소 무거운 소재일 수도 있지만 영화는 지나치게 무겁지 않고 곳곳에 유머코드를 삽입하여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영화 '밀정'을 돋보이게 만든 요소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1.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에 의해 촉발되는 스릴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하던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은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배후를 캐라는 명을 받고 의열단 핵심 조직원인 김우진(공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은 역으로 이정출에게 자신들을 위해 이중첩자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면서 이정출의 내적 갈등이 시작된다.

당시 시대 배경으로 볼 때 이정출이 굳이 독립운동 단체를 위해 애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나름의 장치를 깔아 놓았다. 첫째, 이정출이 한때 의열단으로 상해에서 활동했고 의열단의 핵심이었으나 일본 경찰에 쫓기다 자결한 김장옥(박희순)과는 절친이었다는 설정. 둘째, 의열단 수사에 그의 상관 히가시(츠루미 신고)는 이정출에게 절대 신뢰를 주지 않고 또 다른 조선인 일본경찰 하시모토(엄태구)를 이정출 옆에 붙이면서 이정출의 일본경찰 내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한 상황이 곁들여지면서 이정출의 고민이 시작되게 만든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 죄여오면서 이정출은 위험한 줄타기를 위한 줄에 올라서게 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견제하는 하시모토를 피해 의열단을 어떻게 해서든 경성에 도착하게 하려는 이정출의 행각에 점점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함은 결국 기차 씬에서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 (1996)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보여준 긴장을 촉발시키는 스릴보다 더 강도 높은 긴장감을 보여주는 기차 씬은 여러 등장인물의 동선에 따라 긴장의 진폭을 증대시킨다.

하시모토, 김우진, 이정출 이 세 인물의 시선에 따라 언제 어디서 긴장의 도화선이 터질지 모르는 스릴을 전달한다. 주연배우 공유는 이미 '부산행'에서 밀폐된 KTX 내에 좀비들과의 극한의 전투씬을 통해 관객들에게 긴장을 선사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또 다시 기차에 올라타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선사했다. 올해 유난히도 기차와 인연이 많은 듯싶다.

결국 의열단 내부의 밀정에 의해 이정출과 김우진 모두 하시모토 일당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기차 식당 칸에서의 대립과 격투 장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함을 대폭발시킨다.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2. 배우들의 열연

영화 <밀정> 스틸 이미지

송강호, 공유, 한지민 그리고 특별출연한 이병헌, 박희순까지 등장인물들 모두 자신의 역할을 카리스마 넘치게 소화한다. 특히나 특별출연한 이병헌은 얼마 안 되는 분량만으로도 충분한 카리스마를 선사한다. 다만 아쉬웠던 부분은 김우진의 연인이자 의열단 내 유일한 홍일점 요원인 연계순 (한지민)의 역할이다. 단순한 얼굴마담에 지나친 듯한 인상도 풍겼는데 워낙 스토리라인이 어쩔 수 없이 밀정 노릇을 해야 하는 이정출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연계순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암살'의 안윤옥에 비하면 '밀정'의 연계순은 아쉬울 정도로 수동적이었다. 송강호나 공유 모두 자연스럽게 자신의 역할에 녹아 들어갔고 영화의 흥미를 지속시킨다. 이 영화 최고의 발견은 광기에 가까울 정도로 의열단 체포에 집착하는 조선인 일본경찰 하시모토를 맡은 엄태구였다. 날카로운 외모와 탁 가라앉은 느낌의 목소리로 상대를 겁에 질리게 만드는 카리스마는 영화의 흥미를 더 돋궈주는 압도적인 감초였다. 송강호라는 대배우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카리스마를 맘껏 발휘한 엄태구는 앞으로의 작품을 더 기대하게 만들었다.

3. 세련되고 담백한 표현기법

영화 <밀정> 포스터

영화 '밀정'은 더 감정을 소모시킬 만한 장면에서도 절제된 표현기법으로 감정과잉을 유발하지 않는다. 또한 영화 '페이스오프'에서 선보였던 치열한 총격전 속에서 혼자 헤드폰을 끼고 평화롭게 'Over the rainbow'를 듣고 있는 꼬마의 시선을 포착한 명장면이 떠오르게 만드는 세련된 기법들이 돋보인다. 클래식 음악 배경 속에서 독립군 의열단 단원들이 하나둘씩 체포되는 장면, 이정출이 히가시에게 복수하기 위해 만찬회장에서 폭탄을 설치하는 장면, 이와 동시에 의열단 내에서 일본경찰에 밀정 역할을 했던 배신자를 드레스룸에서 의열단원이 조용히 처결시키는 장면 등이 펼쳐지는데 영화의 세련미를 살려준다.

첩보영화에 비유하면 '암살'이 미션 임파서블의 트렌디한 스타일이 돋보였다면, '밀정'은 007 스타일의 클래식한 운치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누가 또 김지운 감독 영화 아니랄까봐 영화 중간중간 잔혹한 장면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전의 김지운 감독 영화에 비하면 그나마 자제한 표현이라 느껴진다.

세련된 표현기법과 배우들의 호연이 함께 조화를 이룬 영화 '밀정'은 보고나면 더 여운이 느껴진다. 특히 영화 종반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배경에 깔린 OST들이 너무 좋다. 그래서 또 다시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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