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경기는 한때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주심(Referee)이 에누리 없이 호각을 불어 경기를 딱 끝냈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다 보니 이기고 있는 팀은 터치라인 밖으로 볼을 차내거나 넘어지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등 고의로 경기를 지연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름하여 지연작전, 또는 침대축구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를 지연시키는 제3의 기술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지연시간만큼 추가시간(Injury time)을 할애한다. 이제 모든 곳에서 고의시간 지연에 따른 보상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당연한 상식의 흐름이 거꾸로 가는 일도 가끔은, 그러나 아주 심각하게 일어난다. 부산에서 개최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의 첫 지역공청회는 상식과 공통의 룰을 무너뜨렸다. 레퍼리 김우룡은 공술인의 발언시간 초과를 방치하는 방법으로 경기시간을 채운 뒤 휘슬을 불어버려 경상민을 우롱했다.

이로써 부산지역 공청회는 애초 의도했던 지역민의 여론수렴 기능을 상실했다. 건조하게 행정절차법을 거론치 않더라도 공청회가 법령의 제·개정이나 행정청의 주요한 정책의 결정에 앞서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는 민주사회의 기본 절차로 가늠할 때 우리사회 지배세력은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을 버렸음이 틀림없다. 짐작컨대 독재정권, 개발독재, 관치행정이 시민의 의사결정권을 강제 위임해갔던 향수에 빠졌거나 형식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꼼수를 부리는 것말고는 설명이 어렵다.

▲ 6일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가 주최한 부산공청회. 한나라당측 공술인들이 퇴장해버려 자리가 비어 있다. ⓒ김주완
한나라당의 언론법 개악에 70%에 가까운 국민들이 반대했다. 한나라당과 추천위원들은 민주사회의 정당한 여론이 공식화되는 것이 두렵다. 특히 여야가 합의한, 국회가 그 권능을 부여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가 공인하는 여론은 의회의 수적 우세가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하긴 하지만 대강 철저히, 골 메우기 식이다. 이들에게 지역공청회는 애초부터 수용할 수 없는 제안이다.

한나라당의 보호를 받는 국회의원회관 101호의 몇 석 되지 않는 방청석과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는 몇 안 되는 방청객은 무시할 수 있지만 지역사회와 직접 대면하는 지역공청회에 대한 공포는 보통이 넘었을 성 싶다.

지역공청회는 최소로 지역민방 소재지만큼이라도 개최해야 한다는 야당측 요구에 한나라당 추천 위원은 “지역공청회를 가장 많이 하는 미국은 지역마다 법도 달라 지역을 돌 때 매번 다른 주제가 논의될 수 있지만 우리는 전국 13개 시도를 돌아도 내용은 같고 동남아공연 마치고 오는 것과 똑같다”라고 했다.

지역민의 의견을 듣고, 지역 언론의 현실과 언론법 개정이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지역공청회를 ‘동남아순회공연’같은 우스갯소리 정도로 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는 용감함으로도 보아줄 수 없다.

결국 부산, 춘천, 광주, 대전에서만 지역공청회가 결정되었다. 대구, 경남, 경북 지역은 쏙 빼버렸다. 이 지역은 한나라당과 그 뜻이 같으므로 들어보나 마나 재벌방송, 조중동방송에 찬성할 것으로 알고 제외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핑계는 있었다. 많은 지역을 위원회 활동기간 동안 순회할 수 없고 위원들이 매우 피곤하다는 것과 비용이 상당하다는 이유다. 위원들 편하자고 지역민의 의사전달 통로를 차단하고 비용을 핑계로 민주적 절차를 포기했다.

김우룡 위원장은 지역공청회의 목적을 “위원회의 법률개정 논의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했다. 함정이다. 공청회가 논쟁의 확산은 물론 지역민의 주장과 의견을 듣고 반영해야 하는 최종 목적은 애써 피해갔다. 홍보는 하되 상응하는 여론수렴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여야의 합의문조차 오독했다. 지난 3월 임시국회 마지막 날 언론법 처리에 대한 여야의 합의문은 짧고 단순하지만 민주적 처리 절차가 모두 표현되어 있다. “여야동수의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고 문방위에서 100일간 여론 수렴 등의 과정을 거친 후 6월 임시국회에서 국회법 절차에 따라 표결 처리한다.”

합의문 내용 중 “여론수렴 등의 과정을 거친 후”라는 것은 여론수렴 등의 과정을 거쳐야만 6월 국회에서 국회법 절차에 따라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가 공인하는 객관적인 여론수렴은 필수조건임을 분명히하고 있다. 부산 공청회와 같은 반칙은 공인된 여론수렴이 아니란 뜻이다.

한 사람에게라도 더 물어야 한다. 그리고 대중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 대왕 세종께서는 토지세제의 개혁을 위해 17년 간이나 백성들에게 찬반을 물었다.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법과 제도의 제·개정은 국민다수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비용이 들고 더디 간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아니면 왕조시대든지, 독재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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