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또는 평단의 평가와 대중의 인기가 반비례하는 작품이 몇 있다. 영화로 치면 <인천상륙작전>이 그렇고 뮤지컬로 따지면 <풍월주>와 <데스노트>가 그 사례에 속한다. 오늘 소개하는 <도리안 그레이> 역시 이런 사례에 포함될 또 하나의 뮤지컬이다.

요즘 뮤지컬은 투사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막에 배경을 투사함으로 비싼 무대를 짓지 않아도 무대가 영상으로 활용되는 것을 넘어서서 <도리안 그레이>는 영상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마치 <헤드윅>에서 둘이 한 몸이었던 인간이 제우스가 갈라놓은 탓에 둘로 나뉘어졌다는 그리스 신화의 서사를 배우가 아닌 영상이 이야기하듯, <도리안 그레이>도 2막에서 배우가 연기해야 할 플롯을 영화 같은 수려한 영상이 대신 이어가고 있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 Ⓒ씨제스컬쳐

1막의 마지막 장면은 김준수의 팬이라면 눈이 호강하는 황홀경 그 자체일 것이다. 마치 JYJ콘서트를 보는 듯할 만큼 김준수는 기존 뮤지컬에서는 선보이지 않았던 화려한 율동과 무용을 선보인다. 유미주의와 쾌락에 함몰된 도리안 그레이의 향락의 세계를, 김준수는 화려한 퍼포먼스로 김준수 팬과 뮤지컬 팬에게 선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리안 그레이>의 장점은 딱 여기까지다. ‘선택과 집중’에서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위키드>나 <맨 오브 라만차>, <스위니 토드>는 공연 시간이 길다 해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긴 서사라 하더라도 유기적인 이음새를 갖춤으로 공연 시간이 길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만들어주는 서사의 치밀함이 있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 Ⓒ씨제스컬쳐

그렇지만 <도리안 그레이>는 서사의 이음새에 저력이 없다. “유혹을 없애는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것” 또는 “죄의식이 없는 완벽한 쾌락의 완성”이라고 읊조리는 주인공들은 대사만 나열할 뿐이지, 헨리가 도리안을 쾌락의 세계로 빠뜨리는 ‘결정적인 한 방’이 결여된다.

참고로 <스위니 토드>에서 주인공인 스위니 토드가 살인의 세계에 탐닉하게 된 것을 작품은 토드가 복수하려는 판사가 자신의 딸과 결혼하려고 하는 점, 판사에게 복수를 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점 이 두 가지가 복합적인 촉매로 작용해서 결정적 한 방으로 치밀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도리안 그레이>에는 이런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 헨리의 감언이설 몇몇에 그저 그레이가 수동적으로 쾌락주의자가 되고 마는, 서사의 이음새가 헐겁기 그지없다.

도리안이 저지르는 죄 때문에 화가 배질이 고통 받는다고 뮤지컬은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배질이 도리안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필요하겠지만, 뮤지컬에서는 화가 배질과 도리안이 저지르고 다니는 행적과의 상관관계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고 만다.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 Ⓒ씨제스컬쳐

발레에는 ‘디베르티스망’이라는 것이 있다. 서사의 진행과는 별개로 기분전환을 위해 흥겨운 발레를 선사하는 걸 의미하는 용어다. <도리안 그레이>는 뮤지컬임에도 디베르티스망과 유사한 장면이 나열된다. <몬테 크리스토>의 카니발 장면이나 <엘리자벳>, <황태자 루돌프>에서 묘사되는 유럽 황실의 화려함에 <도리안 그레이>가 경도된 탓인지 화려한 복장을 한 앙상블의 등장이 불필요하리만큼 잦다. 앙상블의 잦은 화려한 코스프레 대신에, 뮤지컬은 서사의 개연성에 좀 더 치중했어야 맞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 하나 더, 김준수가 연기하는 도리안과 배질의 관계를 동성애로 묘사하고 있는데, 둘의 감정선이 차곡차곡 쌓이지 못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도리안과 배질의 키스 장면은 매우 뜬금없어 보인다. 뮤지컬 <모비딕>, <그날들> 이후 잘 빠진 창작뮤지컬은 정녕 멸종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공연장을 빠져나오면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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