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쓴 검정 모자의 사내들이 각목을 들고 몰려온다. ‘용역’들이다. “원래 철거는 내년이라 하지 않았소. 갑자기 이러면 우린 어딜 가요?” 좁은 골목길을 노인들이 가냘픈 몸으로 막아선다. 설마 하는 사이 각목이 ‘퍽’ ‘퍽’ 소리를 낸다.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잔혹한 장면이다. “아무나 나와!” 참지 못한 주인공 김신(박용하 분)이 휘발유통을 거꾸로 들어 그 안에 든 액체를 몸에 콸콸 쏟고는 라이터 불을 켠다. 드라마 <남자이야기>의 한 장면이다. 70년대 청년 전태일이 떠오르지만 실은 2009년 오늘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 ‘용산참사’를 겪었다. 70년대의 풍경처럼 말이다. 아직도 철거 현장에서는 이런 전근대적인 상황이 난무한다.

▲ KBS월화미니시리즈 <남자 이야기> ⓒKBS
그런데 언론은 오히려 저항하는 이들을 폭도로 몰아붙이기도 한다. 혹은 쓰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남자이야기>가 바로 이 얘기를 들려준다. ‘타닥타닥’ 철거민 기사를 쓰던 기자가 선배의 호출을 받는다. “어이, 강 기자. 나 좀 봐.” 간단한 담소 뒤 기사와 사진이 기자의 컴퓨터에서 삭제된다. 재벌 2세 최도우의 “기사 막으세요” 명령이 떨어진 직후다. 많은 이의 생존이 달린 ‘진실’이 가볍게 세상에서 사라지는 순간이다. 비록 논픽션이지만 드라마 속 기자는 참 돼먹지 못한 사람들이다. 기사만 안 내보내는 게 아니다. 이 게으른 족속들은 그런 고통의 현장을 알아서 찾아다니는 법이 없다. 드라마에는 철거민들을 돕는 시장이 등장하는데, 이 판타지적 존재가 “기사 쓸 만한 거 많습니다~” 하고 불러모으고 나서야 달려온다.

전직 프리랜서 기자이자 기자 지망생인 나에게 이 드라마는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쓰지 못한, 혹은 썼던 글들이 누군가의 절망이 되진 않았을까. 드라마가 말을 거는 듯해서다. “어이, 너네 기사 제대로 좀 쓸 수 없어?” 또, 이렇게도 말하는 것 같다. “기자들이 하도 안 쓰는 게 답답해서 내가 쓴다. 내가 써.” 처음부터 <남자이야기>는 언론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전면에 내걸었다. 만두파동이다. 언론 보도 때문에 자살한 만두회사 사장의 이야기로 드라마는 출발한다. 식약청과 경찰의 ‘뻥튀기’ 발표를 언론이 그대로 받아써서 만두업체가 줄도산했던 실제 얘기다. 드라마에는 이를 크게 보도한 기자가 등장한다. 무혐의 판정을 받은 만두업체 사장 김욱이 항의를 해도 그는 후속보도를 할 생각이 없다. 결국 막막함을 못이겨 사장은 자살한다. 분노한 동생 김신(박용하)은 기어이 진상을 말해달라고 석궁을 들었고, 감옥에 가게 된다. 뼈아픈 얘기다.

실제 2004년 당시 전체 만두소의 3%에 불과했던 불량 만두소가 대량 유통된 것처럼 연일 보도됐다. 만두시장의 80%가 붕괴했다. 유명 만두업체였던 도투락과 진영식품 등이 도산했고, 비전푸드의 대표 신모씨가 한강에 투신했다. 25개 업체 명단이 불량만두업체로 발표됐지만 이 중 14개 업체는 최종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경찰의 ‘뻥튀기’ 논란은 조용히 보도되었다. 사람들은 누구의 잘못인지 진상을 알게 되었을까? 기사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신중한 보도가 필요하다는 얘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후속보도를 하느냐는 문제, 일상적인 진실을 언론이 전달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진실을 고민하지 않는 언론은 없을 것이다. 많은 현직 기자들이 인권침해와 알권리, 보도의 정당성 사이에서 고민하며 신중하게 기사를 쓴다. 수습은 사소한 숫자 확인을 위해서도 수없이 취재원에게 묻는 것부터 배운다. 사실 확인의 냉엄한 현실을 무시하는 기자는 없다. 하지만 언론이 ‘되는’ 이야기에 매달리는 동안 진실에 목이 탄 사람들이 스러져갔다. ‘만두파동 그 후 5년’. 작가 송지나는 드라마도 만드는데, 기자가 쓴 르포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애초 불량 만두소 유통을 막지 않았던 정부책임은 화려한 25개의 업체명단 발표에 가려졌다. 몇 번이나 위생불량 지적을 받은 단무지 업체가 버젓이 영업을 했다. 그 덕에 써도 되는 재료인 줄 알고 제공받았던 만두업체들은 하루아침에 부도를 맞았다. 정부가 규제완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한강에 투신한 만두업체 사장 신모(35)씨는 사망 직전 식품관련 규제 강화를 호소했다. 그의 사망 이후에야 정부의 허술한 단속과 행정조치가 불량 재료 유통의 주범이라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만두파동 직전 5년간 폐지되었다던 100건의 식품규제는 다시 강화되었을까. 아는 사람이 없다. 기삿거리가 되려면 누군가가 ‘죽거나 나쁘거나’ 해야 하는 현실이다.

<남자이야기>는 만두파동 외에도 사채업자와 신체포기각서, 석궁사건과 미네르바까지 다루고 있다. 주가조작과 개미투자자, 여론조작과 악플러들은 물론이다. 이제는 명목은 국제학교지만 실제로는 카지노를 지으려는 재벌 2세의 철거현장까지 ‘드라마’가 이야기한다. 참다 못해 기사를 쓰는 드라마의 등장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대한민국을 드라마가 쓸 것인가. <남자이야기>가 기자에게 묻는다. 정말 기삿거리가 없느냐고.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