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이라는 젊은이들의 자조섞인 표현 속에는 체념과 한탄이 들어있다. 이 체념과 한탄이 향하는 방향은 정치, 법, 제도, 문화, 즉 체제 그 자체다. 체제 자체에 대해 체념과 한탄을 표현하는 건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체제란 여기에 속한 개인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헬조선’이라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거다.

‘헬조선’을 언급하는 젊은이들이 보기에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법과 제도가 미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대로 운용하기만 하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현실을 보장해줄 수 있는 법과 제도가 존재함에도 이를 애초 취지대로 운영하지 않는 게 문제다. 어떤 면에서 이는 ‘윤리’의 문제로도 말할 수 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서 최소한의 직업 윤리를 지키기만 해도 체제는 지금보다 더 잘 작동할 것이다. ‘헬조선’을 말하는 젊은이들에겐 이게 상식이지만, 세상은 비상식이 오히려 상식이다. 최근 이러한 현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어 젊은이들의 절망은 배가되고 있다.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의 문제를 따져보자. 8월 31일 MBC는 송희영 전 주필이 박수환 뉴스커뮤니케이션즈 대표, 민유성 전 산업은행장 등과 함께 일종의 비공식 모임을 만들어 유지해왔다고 보도했다. 대우조선의 남상태, 고재호 전 사장에 대한 연임 로비 계획 등이 이 자리에서 논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지난 31일 MBC 뉴스 화면 캡처

우병우 민정수석 거취를 둘러싼 사건에서 MBC가 언론으로서 어떤 고약한 역할을 맡았는지를 상기해본다면 이런 보도의 배후에 어떤 권력 의지가 있는지를 추정해보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송희영 전 주필이 언론인으로서 이런 모임에 출석해 권력자들끼리의 즐거움을 외설적으로 향유했다면 언론인으로서의 직업 윤리를 저버린 것이다. 아무리 한국 문화의 특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언론인의 이런 처신은 상식의 수준을 넘어선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고질적 문제는 인사청문회 정국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후보자는 재산 논란에 휘말렸다. 새누리당의 어이없는 ‘보이콧’과 야당의 준비 부족으로 제대로 된 청문회가 진행되지 못한 탓에 의혹 자체가 국회에서 충실히 다뤄지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조윤선 후보자가 어쨌든 공직자로서의 직업 윤리에 충실하려면 제기된 의혹에 대해 성실히 해명하는 건 기본이다.

더군다나 조윤선 후보자는 2008년부터 공인의 삶을 살아왔다. 최소한 그 기간 동안의 ‘증빙 없는’ 과다한 지출 의혹이나 재산형성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조윤선 후보자는 제대로 된 해명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대충 얼버무리는 걸로 때웠다. 5·16 쿠데타의 성격을 묻는 질문에 아직도 “공부가 안 됐다”고 대답하는 것은 공직자로서의 직업 윤리에 충실할 생각이 처음부터 전혀 없었다는 걸 방증하는 사례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왼쪽)과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 (연합뉴스)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후보자로 오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김재수 후보자는 8~90평 대 아파트를 매입하거나 전세를 얻어 살면서 금전적 부담을 크게 지지 않았던 점에서 의혹을 사고 있다. 김재수 후보자가 농림부 관련 부처 및 기관에서 꾸준히 근무해왔다는 점과 하필이면 자금을 대출해준 기관이 농협이라는 점은 의혹의 실체가 어떤 것인지를 추정하는 데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김재수 후보자 역시 얼버무리는 걸로 일관하고 있으나 애초에 농림부 등의 고위간부가 협동조합인 농협에 대출을 신청하는 것 자체가 공직자로서의 직업 윤리에 맞지 않는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장관 후보자들이 결국은 임명이 되고야 말 것이라는 상황 역시 윤리가 없어 보이는 문제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장관 후보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미 두 가지 제도적 대비책을 갖고 있다. 하나는 청와대의 인사검증이고. 또 하나는 국회의 인사청문회이다. 이런 후보자들을 인사검증한 청와대의 담당자는 아마도 우병우 민정수석의 영향력 아래 있었을 것이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최근 휘말린 의혹 등을 돌이켜볼 때, 조윤선 김재수 두 후보자의 의혹 같은 것은 진지한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었다는 건 너무나 명백하다. 후보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든 인사청문회에 보내고, 버티고, 임명하면 되기 때문라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과연 이런 행태가 인사검증을 맡은 공직자로서의 직업 윤리에 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우병우 민정수석이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인사청문회를 무력화시키는 게 대통령 본인이라는 점은 이 사태의 본질이 정권의 차원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과거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내고도 경찰 신분임을 숨겨 징계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그대로 임명됐다. 국회가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대통령이 재론을 요구한 기한은 단 하루였다. 어차피 국회가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을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임명을 강행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셈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이철성 경찰청장의 사례와 같은 방식으로 임명 절차가 진행되리라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인사청문회를 이렇게 무력화시키는 게 과연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직업 윤리에 맞는 것인지 의문이다.

대통령의 직업 윤리를 따지자면 국정 전체가 문제라는 얘길 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는 정부 수반으로서의 역할과 국가를 대표하며 사회통합을 이끄는 국가 원수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국정을 책임지는 것은 국가기구와 제도를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며 사회통합이란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을 조정하고 절충하며 그 과정에서의 설득을 맡아 하는 게 핵심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불분명한 국정 구상을 관철하기 위해 행정과 입법을 모두 무력화시키고 있다. 4·13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의 반영으로 국회가 여소야대로 구성되자 국회의 기능 자체를 무시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고위층의 여러 추문으로 사회가 어지러운 가운데 이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울 정무적 결단을 해야 하는 책임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직을 유지시킨 채 검찰 수사를 받도록 하고 의혹을 제기한 언론의 약점을 잡아 ‘부패 기득권 세력’으로 규정하고 재갈을 물리는 행태가 대표적이다. 이 모든 무리수는 오직 자신의 통치 권력 연장만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통령은 정부 수반으로서도 국가 원수로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직업 윤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원칙은 무시하면서 남에게 원칙과 신뢰를 말하고 강요하는 것은 사람들의 냉소적 세계관에 강한 근거를 더하게 될 뿐이다. 뉴스만 틀면 직업 윤리를 내팽개치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기득권층이 화면을 장악하는데 젊은이들이 무슨 희망을 갖겠는가. 최근 박근혜 정권이 보여주는 광경 모두가 ‘헬조선’ 그 자체를 나타낸다. 대통령이 ‘헬조선’을 말하며 남 탓을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건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이런 기만적 권력이 다시 또 태어나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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