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책을 읽고 영화를 보시나요? 전 일단 재밌어서 봅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현실의 많은 고민들을 잊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가끔 감동을 주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우연히 접한 책과 영화가 제 삶의 방향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삶이란 큰 배를 탄 사람들은 종종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합니다. 이럴 때 책과 영화는 좋은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합니다. 책과 영화의 두 번째 강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냥 살면 굳어버릴, 아니 굳는 걸 넘어 화석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르는 뇌에 자극을 줍니다. 먹고 자고 싸는 것만 생각하며 사는 제게 책과 영화를 접하는 순간은 유일하게 뭔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전 책을 읽고 영화를 봅니다. 앞으로 책과 영화의 세 가지의 장점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제가 보고 재밌었던 것, 제 삶에 일정 부분 방향을 제시해준 것, 끝으로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것들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쓴 허접한 칼럼이 여러분들이 사고하는 데 1g이라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길 바랍니다.

삶이 우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전 두 가지 방법을 택합니다. 하나는 우울함을 극복하기 위해 더 즐겁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방법. 밖에 존재하는 즐거움을 통해 내 안의 우울함을 치유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더 슬프고 우울한 무언가에 빠져드는 방법. 일단 우울한 마음을 극한으로 내려, 감정의 도약을 꾀하는 방법입니다. 이번 주엔 첫 번째 방법을 택했습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선택했거든요. 원제는 <Vicky Christina Barcelona>인데요, 순식간에 3류 영화 제목으로 탈바꿈했습니다. <내남자의 아내도 좋아>라는 제목은 앞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번안으로 회자될 거라 확신합니다. 어쨌든 전 우디 앨런의 신나는 코미디, 스칼렛 요한슨과 페넬로페 크루즈와 같은 미녀, 그리고 일상의 탈주를 꿈꾸게 해주는 바르셀로나라는 공간까지, 보고 있으면 눈이 마냥 즐거울 것 같았습니다.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떠난 비키와 크리스티나. 두 사람은 그곳에서 화가 후안을 만납니다. 크리스티나는 후안의 매력에 곧바로 빠집니다. 하지만 비키는 무작정 들이대는 후안이 처음엔 불쾌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비키마저 후안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삼각관계가 시작된 것이죠. 크리스티나와 후안의 동거가 시작되는데요. 그 때 후안의 전처 마리아가 등장하며 복잡한 네 사람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예상대로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했고, 잔뜩 호강한 눈 덕분에 우울했던 기분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즐거움과 함께 머리에서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는데요, 그 한 가지가 바로 배와 항구였습니다.

▲ 영화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포스터
심수봉은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고 노래했지만, 실제로 성별과 무관하게 사람은 배와 항구로 구분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배형(Ship Type) 인간. 말 그대로 정착보다는 유목에 삶의 방점을 찍고 사는 사람입니다. 안정보다는 변화를 추구하고,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새로운 가치를 추구합니다. 실제로 배 위에서 생활하던 선원들의 법과 질서는 육지의 것과 다른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낭만을 연상시키는 마도로스의 생활답게, 배형 인간은 이성보다 감성이 발달한, 낮보다 밤이 어울리는 인간입니다. 엄정한 수와 논리의 세계보다는 무질서와 창조가 허용되는 예술의 세계에서 배형 인간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고요. (어렸을 적부터 공부엔 관심이 없고, 영화만 보던 영식이. 결국 40살 넘게 미혼으로 살며 조연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래도 영식이는 행복합니다. 그에게 결혼이나 직업적 성공은 중요한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죠. 대략 영식이를 배형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반대로 항구형(Harbor Type) 인간은 정착을 중시합니다. 안정된 삶과 특정 분야에서의 성공을 추구합니다. 기존 사회가 제시한 가치를 빠르게 흡수하고, 그 가치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발전시킵니다. (어렸을 적부터 공부에 적당한 관심이 있으면서, 영화를 즐겨보던 덕수. 결국 40살에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증권가의 펀드매니저로 살고 있으며, 인터넷에서 사이버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입니다. 항구형 인간에 가까운 덕수도 물론 행복합니다.)

극명하게 다른 두 유형의 여성이 등장하는 우디앨런의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를 보며 배형 인간과 항구형 인간을 떠올렸습니다. 영화 속 비키(레베카 홀)는 항구형 인간에 가깝습니다. 석사 논문 준비 차 스페인에 온 비키. 유능한 월가 직원과 약혼한 상태며,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사랑을 거부합니다. 반면 크리스티나(스칼렛 요한슨). 아무 생각 없이 비키 따라 스페인에 왔습니다. 얼마 전 사랑의 이별을 경험했으며,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배형 인간으로 분류할 수 있겠죠. 물론 두 인간형 중 어떤 인간형이 더 우위에 있다는 가치판단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감히 영식이와 덕수 행복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다만 영화는 약간의 가치판단을 시도하는데, 먼저 제목에 가치판단의 단서가 숨어있습니다. 비키, 크리스티나, 그 다음이 바르셀로나입니다. 뉴욕도, 런던도, 모스크바도, 베이징도 아닌 바르셀로난데, 이 부분이 전체 영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거죠.

▲ 바르셀로나 풍경. ⓒ알스카토
지난여름 방문한 바르셀로나는 감성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거리 곳곳에 악기를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들이 있었고, 정형화를 깨부순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해변엔 웃통을 벗어젖힌 남녀가 거리낌 없이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고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미로와 피카소의 작품도 바르셀로나의 자유로움에 방점을 찍어줍니다. 월가로 대표되는 뉴욕이 엄정한 수의 논리가 지배하는 로고스의 도시라면, 가우디의 건축물로 대표되는 바르셀로나는 무질서의 감정이 지배하는 파토스의 도시인 셈이죠. 때문에 영화 속 바르셀로나는 배형 인간들이 넘실대는 판타지의 공간이며, 그곳에서 항구형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속 비키의 약혼자. 뉴욕의 유능한 금융인입니다. 그는 새로 산 비싼 소파에 대해 얘기하고 집에 딸린 수영장을 중시하고 주말에 테니스와 골프를 즐겨 치는 그런 평범한 현대인이자, 항구형 인간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 비키의 약혼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시종일관 찌질한데요. 왜 그럴까요? 영화 속 배경이 바로 배형 인간의 홈타운인 바르셀로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화가 <비키, 크리스티나, 뉴욕>이었다면 찌질해지는 인간은 아마도 후안(하비에르 바르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립적인 두 주인공이 바르셀로나에서 보내는 시간은 어떨까요. 먼저 크리스티나. 이곳에서 만난 화가와 사랑에 빠지고 곧바로 동거에 들어갑니다. 화가의 전처가 나타나지만, 그와도 예술적 취미를 공유하며 잘 지냅니다. 두 여자와 한 남자의 기묘한 동거가 이뤄집니다. 화가와 전처는 그림을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사진을 찍습니다. 그들이 머무는 공간은 엄격한 질서를 넘어서는 자유분방함과 예술 특유의 감성적 에너지로 넘쳐나죠. 애초 배형 인간에 가까웠던 크리스티나는 배형 도시에서 살아가는 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르셀로나로 원정 온 뉴요커 비키입니다. 비키는 논문에 필요한 이성만 남겨놓은 채, 원초적이고 무질서한 감정 에너지는 마음 속 알카트라즈에 꼭꼭 가둬놓고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감정 에너지가 고향(바르셀로나)의 향기를 맡고 탈주를 시도합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화가 후안. 하지만 그와 함께 기타 연주를 듣고 난 후, 마음 속 알카트라즈의 문이 열리고 마는 거죠. 결국 비키는 후안과 순간의 짧은 황홀감을 만끽합니다. 바르셀로나의 분위기에 뉴요커는 굴복한 셈이다.

▲ 바르셀로나 풍경. ⓒ알스카토
비키와 크리스티나의 차이만큼이나 대립적인 인물이 또 있습니다. 바로 후안 커플과 비키 커플입니다. 먼저 비키 커플은 여간해선 싸우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죠. 예의를 지키고 격식을 갖춥니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갈등할 일도 거의 없습니다. 반면 후안 커플. 사랑도 뜨겁고 싸움도 화끈합니다. 그림에 대한 영감을 서로 공유하고, 바르셀로나의 뜨거운 태양 같은 각자의 감정을 쉽게 드러냅니다. 하지만 커다란 두 감정 에너지는 종종 부딪히고, 싸움의 격렬함은 때로 피를 부르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항구형 커플과 배형 커플인 것이죠. 항구형 커플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사랑을 해나갑니다. 하지만 뜨겁게 타오르지 않습니다. 항구형 커플은 비키처럼 때로 순간의 뜨거움을 갈구합니다. 배형 커플은 뜨거운 대신 지속성이 떨어집니다. 쉽게 헤어지고 상처받습니다.

자 그럼, 영화 속 인물들을 수평 그래프 위에 위치시켜보죠. 그래프 오른쪽이 항구, 왼쪽이 배입니다. 가장 오른쪽엔 비키의 약혼자가 있겠네요. 조금 왼쪽에 비키가 보이고요. 우리 대부분이 이 근처에 분포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구형 인간이되, 내면에서 은근히 배형 인간을 꿈꾸는 것처럼요. 훨씬 왼쪽으로 가서 화가인 후안이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도 비슷한 곳에 위치하겠죠? 화가의 전 부인 마리아가 가장 왼쪽입니다. 마리아는 감정에 휘몰려 남편에게 칼과 총을 들이대고, 이별의 슬픔을 못 이기고 자살을 시도하는 인물입니다. 시종일관 외국산 소파와 가구를 얘기하는 비키의 약혼남이 찌질했다면, 후안이 전처 마리아는 사이코에 가깝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겐 배형 요소와 항구형 요소가 함께 있습니다. 다만 좀 더 왼쪽(배 쪽)에 위치하거나 오른쪽(항구 쪽)에 위치할 뿐입니다. 우린 수평선 위에서 배와 항구를 양손에 쥐고 외줄타기를 하며 살아갑니다. 어느 쪽이 더 옳고 그른 것은 없겠죠. 다만 분명한 건 외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결국 찌질해지거나 사이코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결국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보며 눈도 호의호식하고, 머리도 나름 열심히 운동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와 책을 읽고는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화 보고 하는 생각은 고민이 아닌, 놀이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놀이에 동참하길 권유합니다.

책, 영화, 여행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경험을 추구하는 부지런한 블로거, ‘알스카토’입니다. (http://blog.naver.com/haine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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