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봄’이다. 부산영화제가 풍성한 ‘가을’이라면, 전주는 생동하는 ‘봄’이다. 이른 더위의 초입, 열정의 초심으로 전주영화제는 올해 10년을 맞았다. 10년은 긴 세월이다. 전주영화제도 많이 달라졌다. 생동적 아마추어리즘의 공간이던 전북대 문화관에도 여전히 영화는 돌아가지만, 축제의 메인 스트리트는 이제 다분히 비즈니스적인 공간인 ‘영화의 거리’로 바뀌었다. 그 거리엔 도심의 모든 중심가가 그렇듯, 아무런 특색이 없다. 전주 ‘영화의 거리’는 영화제의 정체성을 멀티플렉스에 걸고, 인디문화의 감수성을 소비문화와 뒤섞어 성립되는 공간이다. 전주영화제 10년의 풍경은 적당히 흥겹고, 적당히 붐비면서 또 적당히 지루했다.

전국이 ‘촛불’의 사정권에 든 하수상한 시절이지만 과감히 전주로 내려 왔다. 이렇게 계속 할 순 없을, 에너지 고갈의 시절임에도, 먼 길 마다않고, 찜질방에서 쪽잠을 자며, 영화에 매달리는 누군가들의 난해한 열정에서 영감을 얻고 싶었다면, 너무 거창한 핑계가 될까 싶지만 진짜로 그랬다. 과정은 가혹했다. 2009년에 딱 한 번뿐인 황금연휴를 맞아, 어디론가 떠나는 행렬들의 꼬리를 물고, 무려 7시간을 고속도로에 통행료로 납부하고 나서야 전주는 우리를 받아주었다. 거의 모든 영화를 매진시켜버린 압도적 씨네필들 사이에서 아이디카드도 없이 겨우 한 편의 영화를 제시간에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그 영화와 다음 영화 사이의 빈 시간에 함께 영화제에 내려온 사람들과 ‘영화의 거리’ 한복판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방담을 핑계로 댔지만, 한없이 잡담에 가까운 수다였다.

<방담 참석자>

완군 : 미디북스 에디터
형진 : 미디어스 객원기자
S군 : 광화문 씨네큐브 건물로 출근하는 직장인 3년차
K양 : ‘일드’라면 빠뜨리지 않는 직장인 5년차

우리에게 전주는

완군 : 전주 어때?
S군 : 7시간이나 걸려서 그런지 모든 것에 감사해^^ 어제 새벽에 도착하자 맛본 ‘오원집’의 고추장 불고기는 뭐랄까, 웰컴 투 전주의 맛이었다고 할까. 근데, 숙소 잡기가 넘 어렵더라.
K양 : 아직도 자다 깨다 자다 깨다 새벽에 여관 찾은 것밖에 기억이 안 나.
형진 : 전주는 확실히 ‘사랑의 도시’는 아닌 것 같아. 전통과 양반의 도시여서인지, 하룻밤 욕망이 충만할 곳은 확실히 아니야. 여관에서 먼지 냄새 나더라.
K양 : 그런데, 영화제 풍경이 진짜 별로 없다. 나름 기대했는데 말이야. 여긴 너무 쇼핑의 거리야.
S군 : 부산영화제에 가봤는데, 거기에 비하면, 전주는 너무 작다. 그 흔한 자원봉사자도 별로 안 보이고, 시내에 영화제 깃발도 별로 없더라고.
K양 : 난 그냥 여기(영화의 거리 커피전문점)도 너무 어지러워. 아 맞다. 전주 CGV는 건물이 넘 연식이 오래돼 보이더라. 그 건물 보며 결심했어. 난 그냥 전주에 온 것뿐이다.
형진 : 맞아, 신기하긴 하더라. 그래도 명색이 10주년인데 영화제 분위기도 너무 딸리고, 홍보 대사(이지훈, 조안)도 약하고.

▲ 방담에 앞서 각각의 개성대로 시킨 음료들@김형진
타인의 취향

완 : 우선, 취향들부터 좀 확인을 해볼까? 진부한 질문이지만 최근 영화중에 기억에 남는 영화들은 뭐야?
형진 : 난 <가족의 탄생> 그냥 그런 영화가 좋아. 엄태웅이 고두심과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설정도 신선했고, 나왔던 배우들도 완전 좋았어.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고 할까. 일본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도 좋았어. 소소한 것들에 대한 재해석이랄까. 스케일 큰 거보다, 그런 자잘한 것들이 좋더라.
S군 : 나는 <워낭소리> 괜한 것이다 싶기도 하지만, 영화 보는 내내 뭔가를 인위적으로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사는 것 같은 풍경 참 좋더라.
형진 : 난 안 봤지만 누구는 그거, 할아버지가 소 학대하는 거라던데?
S군 :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는 싶었어. 근데 그래도 좋더라고. 쫓기고 쫄리는 일상에서 그런 낭만이라도 가져볼 수 있었다는 거. 그 모두가 그냥 영화였다고 해도.
K양 : 난 <키친> 좋았어. 주지훈 나왔던. 내용보단 화면이 너무 예뻤어. 주지훈도 완소남이고. 영화는 일단 별 생각 없이 좀 예쁘고 착해야 해.
형진 : 완군은 뭐 좋았어?
완 : 생각해보니, 난 별로 없네. <록키 발보아> 정도. 아버지 생각나서 ㅋ

열정의 까닭 혹은 그냥 탈출

▲ 5월2일 영화는 모두 매진됐다@김형진
완 : 근데, 사람들은 왜 여기까지 영화를 보러 올까?
형진 : 일종의 문화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게 아닐까? 개봉된 상업영화만 보는 이들과 자신을 구별 짓는 방식으로. 남들과 차별된 어떤 취향에 시간과 관심을 투자한다는 것 자체가 만족스런 일이니까.
완 : S군은 왜 왔어?
S군 : 원래 영화 별로 안보는 편인데, 회사에서 전주에 영화제 간다니까, 다들 ‘영화 좀 보나 보다’ 하더라. 잠깐, 우쭐해지는 기분이랄까 신선했어. 우리 회사 밑에 씨네큐브 있는데, 실은 거기서도 몇 편 본 적 없어. ‘아, 이런 영화 하는구나’ 하고 포스터만 보는 정도지. 나름 첫경험이라 내려오기 전에 호기심이 들더라고. 게다가 연휴잖아. 뭐 이런 것들이 복합적이지 않았나 싶어. 아, 맞다. 그리고 진짜 나라가 너무 우중충해서 개인적 차원의 충전이란 생각도 했어. 음식까지 훌륭한 전주라서 더 매력적이었고. 내가 그래서 그런지 여긴 행락객이 70%는 되는 거 같아.
K양 : 누구나 영화제는 알고 있잖아. 난 거기에 간다는 그런 느낌이 자체로 젊은 기운이 들더라고. 별 다른 이유 있어, 뭐 이런 거지.
완 : 형진은 영화제 왜 와?
형진 : 영화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놀고 또 먹고. 영화를 열심히 보진 않아. 하루에 2편 정도 보면 선방이지. 영화를 본다기 보단 나도 어떤 느낌인 거 같아. 내가 이 축제를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즐기러.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건 부산보단 전주가 느낌이 좋다는 거야.
완 : 근데, 그 정돈 서울에서도 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S군 : 서울은 의미가 없어. 일상에서의 탈피가 안 되잖아. 직장인에겐 그게 젤 큰 거야. 일상에서의 탈출.
완 : 영화만 놓고 보면,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기회와 장소는 많이 생겼잖아. 아무리 그래도 비용의 측면에서 보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효율적이고, 서울에선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라고 불리는 것들 얼마나 봤어?
S군 : 1년에 5~6편 정도 보는 거 같아. 아무래도 회사 지하에 ‘씨네큐브’가 있다 보니. 기회가 늘어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지리적인 걸 무시할 수 없는 거 같아.
형진 : 서울에선 오히려 볼 영화가 없다고 느껴져.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 건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 영화는

▲ 10주년을 맞이해 설치된 영화의 거리 풍경@김형진
완 : 왜 90년대 중후반에 문화의 세기라고 불리던 하나의 흐름이 있었잖아? 우린 모두 학생이었고, 열심히 봤던 씨네21도 그 시절의 산물이고, 우리 세대에게 영화란 뭐였을까?
형진 : 영화에 큰 의미 부여는 안 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일종의 습관 같은 거야. 물론, 그 습관이 들지 않은 사람에 비하면 훨씬 풍요롭게 산다는 생각은 해. 그런 상대적 의미를 제외하면 시간 때우기로 선택하는 가장 편리한 것일 뿐야. 보편화된 무난한 취미.
K양 : 그런가? 그래도 내겐 고가의 휴식이야. TV에 비해, 인터넷에 비해 영화는 비싸지.
S군 : 우리 학교 다닐 때는, 처음 아이돌이 나왔을 때처럼 영화가 많이 나왔던 거 같아. 그래서 그냥 다 좋아하는 것 같아. 함께 공유하는 이야기꺼리처럼.

<너 없인 살 수 없어>란 영화

완 : 오늘 본 <너 없인 살 수 없어>는 어땠어?
형진 : 언젠가부터 영화제 오면 눈이 확 떠지거나 아니면 졸리더라고. 오늘도 그랬어. 흑백화면이 생각보다 눈에 거슬렸어.
S군 : 맞아. 생각보다 별로였어. 별점은 두개 반.
K양 : 이것도 독립영화가 맞나? 외국 독립영화는 처음 봤어. 새삼 느꼈어. 아무리 뭐라 해도 상업영화가 훨씬 더 재밌어^^
형진 : 한동안 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면, 뭔가의 차별성을 찾으려 했던 것 같아. ‘재밌다, 재미없다’의 평가보다는 해석을 하려는 경향이 내 안에 있었던 것 같아. 근데 이젠 안 그러려고 해. 그건 일종의 우월주의, 강박인 거지.
S군 : 헉! 난 그랬는데. 일종의 어떤 강박에서 봤어. 대세는 미니스커트인데 롱스커트를 보는 느낌이었지만, 뭔가 메시지가 있으려니 하고.
K양 : 영화에서 메시지를 찾거나 평론가가 되고 싶어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다는 게 불편하게 느껴져. 사실 영화에서 대체 뭘 찾아야 하는 거야? 영화는, 재미없으면 그만인 거야.
완군 : 그럼, 감독은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S군 : 영화감독이니까. 너무 당연한 얘기 아닌가. (일동 웃음)
형진 : 실화라고 했는데, 난 다른 것보다 그것만 보이더라. 한국 배우들은 왜 배가 안 나올까?
완군 : 무슨 소리야?
형진 : 오늘 주인공이 배가 많이 나왔잖아. 그게 너무 자연스럽더라고. 한국에서 저 영화를 찍었다면 안성기 정도가 맡았을 텐데. 안성기는 무능력한 아버지 역할을 하기엔 너무 날씬하잖아. 그 자체로 현실적인 느낌이 없어. 한국 배우들은 죄다 너무 배우처럼 생긴 것 같아. 얼마 전에 본 <우리집에 왜 왔니?>에서 강혜정이 노숙자로 나왔는데, 그래도 너무 예쁘더라고.
K양 : 실화라던데, 난 대만에서 이게 얼마나 큰 이슈였는지 궁금해. 사실 별 얘기 아니잖아. 한국에선 <긴급출동 SOS> 같은데 보면 흔하게 나올 법한 사건이고. 실제 사건이었다고 하니까 와 닿는 측면이 있었는데, 대만에선 어땠나 싶더라고.
완군 : 영화는 아버지가 처한 상황을 담담하게 보여주잖아. 공무원은 친절하게 아버지의 자격을 박탈하고, 행정이 처리되는 방식에서 당사자인 아버지는 무엇에도 개입할 수 없고, 결국 자식을 뺏기고 감옥에도 가야하는 상황 앞에서 철저히 무기력해지지만, 그것이 우리의 법 상식에선 너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리는, 만약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난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딸을 앉고 육교에 설 수 있었을까 말야, 어땠어?
형진 : 글쎄, 모르겠어. 워낙 억울한 일 많다고 자연스레 생각하는 거 같아. 아까 말한 SOS 같은 일들. 그 프로그램은 결국 그게 당신의 일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는 안도감을 파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애틋한 경험이 없어서 육교에 설 수 있을진 잘 모르겠고, 난 그 생각나더라. 벤츠로 SK에 돌진했던 사람. 다른 이유가 없었더라면 개인의 힘으론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분노가 발생하는 상황 말이야.
K양 : 난 감정이 이입되기보단 영화의 허점이 먼저 보이더라. 입양절차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했어. 영화처럼 치밀한 국가적 복지체계를 갖추고 있는 사회에서 수년전에 집 나간 엄마가 진짜 그 아이를 뺏어갈 수 있을까 하는. 또 수백킬로미터를 오토바이로 달려가 딸을 지키려던 남자였다면 육교에 서는 허무한 결정보단 영리하게 도망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럼 이번엔 <공개수배> 같은데 나오려나? 공무원들이 책임을 돌릴 때는 그 생각도 들더라. 개그콘서트 뿌레땅뿌르국 같은. 이건 내 소관이 아닐세.
형진 : 영화를 보는 동안 심정적으로 계속 아저씨 편이 되는데, 그래도 저 아이는 학교에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검열이 들더라고. 어느 나라도 그 사이의 선택을 갖고 있진 않은 거지. 그리고 역시 모든 나라의 공무원이 어쩔 수 없다는 것 같다.
S군 : 형진의 말은 촛불집회 유모차 부대를 보는 시선과도 똑같네. (일동 웃음)

완 : 내년에도 전주에 또 올 거야?
S군 : 일 없으면 또 오고 싶어. 단 그 전에 앞으로 시간 쪼개서 씨네큐브에 좀 열심히 다녀볼까 해.
K양 : 난 영화제 때문에 올 것 같진 않아. 근데, 전주는 좋네.
형진 : 계속 영화제 아이디 카드가 있었는데 없으니까 피곤하더라. 일반 관객의 열정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난 내년에도 올 테야. 맛난 거 있으니까.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