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운동에 대한 이런 저런 논평으로 작년 1년간 쓰여진 잉크의 양은 아마도 작년에 타올랐던 촛불의 촛농의 양을 넘어설 것이다. 위대성을 찬양하건 한계를 비판하건 나올 만한 논점들은 어느 정도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되지 않는 주제가 하나 있다. 왜 하필이면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였나? 아직도 형성중인 국가 대한민국은 잘 살펴보면 부조리 투성이며 사실 전 국민 혹은 적어도 수십만명이 함께 공분할 만한 모순은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정도 규모와 이 정도 깊이의 그것도 거의 완전한 자생적 대중 투쟁이 벌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어찌보면 미국산 쇠고기 이상으로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또 그 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 비정규직 고용 형태의 모순도 폭발적 대중 투쟁은커녕 먼저 일어선 이들을 잔인하게 고립시켜 버릴 정도로 그 폭발력이 냉랭하다. 이 정도 규모로 전국 주요 도시의 시내가 인파의 물결로 휩쓸린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두 손에 꼽을 정도이며, 가까운 몇 년간을 보자면 미군에 의한 여중생 살해 사건이나 탄핵 국회 반대 투쟁 정도뿐이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의 그 어떤 것이 사람들의 어떤 심정적 코드를 건드렸기에 이러한 규모의 투쟁이 나오게 된 것인가에 대한 토론은 잘 보이지 않는다.

▲ 2008년 5월 10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문화제 ⓒ 민중의 소리 김철수기자

‘공공성’에 대한 자각

분명히, 미국산 쇠고기라는 사안이 ‘공공성’에 대한 사람들의 자각을 일깨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타당하다고 보인다. 이 문제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누구라 할 것 없이 이야기의 초점을 이명박 정권이 추진 중인 대운하라든가 의료 및 교육의 민영화와 같은 ‘공공 부문’의 상품화 전반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이 주장의 타당성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후자의 문제들은 어제 오늘에 나온 것이 아니었고 또 쇠고기 문제 이상으로 공공성에 심각한 문제를 던지는 것이었음에도 왜 그러한 자각을 일깨우게 된 계기가 유독 ‘미국산 쇠고기’였나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마도 쇠고기가 이러한 문제들과 달리 사람의 존재에 가장 가까운 매일 매일의 밥상 그리고 그것으로 거듭 만들어지는 우리의 몸이라는, 실로 우리 존재에 긴밀하게 (intimate) 그대로 와 닿는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쟁점들은 그 파괴적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여러 제도의 논리와 숫자 계산 등을 매개로 했을 때에만 문제로서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이기에 지식층 등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을 넘어서서 절실한 문제로서 공론화되기에 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하지만 소고기는 다르다. 이는 잘 살건 못 살건 배웠건 못 배웠건 한국 사람들 누구나가 자신의 존재의 일부분으로 여기는 매일 매일의 밥상에서의 작은 기쁨과 즐거움의 문제이며, 이것이 그토록 흉측한 질병의 원천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사람들 마음 속 깊은 곳의 공분(公憤)의 코드를 울렸음은 분명한 것 같다.

그 울림을 크게 증폭시킨 것은 지배층의 태도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우선 소위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게 해 준다는 데 왜 난리냐’는 고압적인 태도이다. 사람들이 외치는 것이 바로 그런 고기 먹기 싫다는 소리인데, 여기다 대고 그거야말로 ‘질 좋은 쇠고기’라고 어거지로 우기고 있는 꼴이다. 여기서 이승만 박정희 시대 이래 한국 사회에 남게 된 어두운 유산, 즉 ‘까라면 까지 웬 말이 많으냐’는 시대착오적인 보수 지배 세력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그런데 지난 십몇년간의 민주화 과정에서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고 용납하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그런 식의 태도라는 것을 그들은 거의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그리하여 이 ‘몸과 음식을 건드리는 것’에 대한 공분은 곧 ‘사람을 무엇으로 보는 것인가’라는 더 큰 공분으로 순식간에 전환했다고 보인다.

그런데 이 ‘사람을 무엇으로 보는 것인가’라는 명제에 착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적 맥락에서의 토착적인 ‘공공성 의식’으로 뻗어나갈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 차량 속 시민들이 촛불집회 행진대열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민임동기
공공성의 내용

공공성(公共性)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실로 그 정의가 아직도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개념이다. 이 말 자체가 일본에서 생겨난 한자 조합어로서, 근대 사회의 다른 개념어들과 달리 서양 언어의 번역어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영미권에서도 이러한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있어서 publicness라는 조어를 만들어서 쓰기도 하지만, 그 어색함은 감출 길이 없다. 또 일본에서도 본래 이 말이 쓰이던 맥락은 2차 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시절 국가 영역의 초월성을 의미하는-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심히 반민주적이요 반시민적이라-‘멸사봉공’의 의미를 담는 말로 쓰인 바 있었다. 비록 지난 몇십년간 일본의 시민 사회가 이 말을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정초하여 쓰고자 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 개념의 사상적 철학적 정의와 맥락은 애매모호한 점이 남아 있다. 이렇게 일본에서도 1세기 동안 큰 혼란을 겪은 개념이라는 점, 서양에서는 아예 여기에 해당하는 언어조차 마땅치 않다는 점이 이 공공성이라는 개념의 실질적 의미가 애매모호한 점이 많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정치 철학자들이 이 말을 학술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말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정신 세계를 구성하고 또 사회적 생활 세계를 만들어 나가야 할 보통 사람들이 이 말을 어떻게 관념하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학자들의 ‘계몽’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이 전통적으로 공유해왔던 정서와 사상 그리고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의 변화에 맞서 그러한 정서와 사상을 근거로 한 집단적 실천을 만들어내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촛불 운동은 한국인들이 한국적인 맥락과 의미에서의 공공성의 내용을 채운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년의 경험 속에서 사람들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각인된 그 한국적인 공공성의 내용이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우리’ 그리고 ‘함께 살자 대한민국’이라는 관념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외람되지만 나의 소견으로는 이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닌 우리’라는 관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에서 보듯 아주 오래 전부터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데에 뿌리 깊은 중심을 차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체로서의 ‘나’에서 시작하여 ‘너’와 ‘타자’를 정립하고 그러한 주체-타자의 이항 대립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도출하는 근대 서양의 사고방식과는 다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우리’의 내용을 만들어 내고 더욱이 그것을 정서적으로 느껴 몸으로 체화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워서 ‘공동체’의 구성이라는 복잡한 문제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서양 사회사상에서 ‘공공성’의 개념이 계속 빈칸으로 남아 있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 순서가 반대로 되어, ‘인간’이라는 범주에서 시작하여 ‘나’와 ‘너’ 이전에 ‘우리’가 있었다는 정서-개념이 아니다-에서 출발한다면 공동체의 구성도 또 공공성의 내용이나 개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정서와 행동에 체화되어 있을 수 있다. 촛불 운동에서 가장 많이 가장 보편적으로 울려퍼진 구호이면서도 또 그 정서 전체를 가장 잘 집약하고 있는 구호가 그래서 앞에서 말한 ‘함께 살자 대한민국’ 또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겨레의 정서의 기초가 된 독특한 인본주의-개인이 아닌 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공공성 싸움의 소중한 교두보

공공성과 관련된 의제들은 사회적 운동의 쟁점이 되기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근대 사회에서의 사회 운동은 기본적으로 ‘나’ 혹은 그것이 확장된 것으로서의 계급 혹은 민족과 같은 주체를 전제로 하며 여기에는 항상 다른 계급이나 다른 민족 혹은 다른 이해 집단과 같은 투쟁의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전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모두를 포괄하는 이익’으로서의 공공성이란 아주 모호한 것이 되어 ‘아무의 이익도 아닌 것’으로 쉽사리 돌변하여 운동의 동력을 찾기 힘들게 되는 것이며, 흔히 ‘국가의 멸사봉공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촛불 운동에서 우리가 다시 확인한 소중한 유산으로서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그 이전에서의 우리 즉 인간’이라는 정서는 앞으로 터져나올 각종 공공성의 의제들-의료, 보건, 교육, 4대강 개발 등등-에 있어서 믿고 기댈 담론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생각된다. 촛불 운동에서의 한계와 위대성에 대한 많은 견해와 토론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미국산 쇠고기라는 쟁점의 특수성, 그것이 한국인들의 전통적 정서와 사상의 코드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라는 쟁점도 함께 생각해본다면, 촛불 운동이야말로 한국의 토착적인 공공성 싸움의 소중한 자산이라는 평가도 덧붙일 수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