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의 박보검과 김유정은 일종의 미끼라고 할 수 있다. 지금껏 수많은 사극들이 좀처럼 다루지 않은 효명세자의 일대기를 담은 이 드라마는 사실 그 어떤 사극보다 더 비극적이다. 그저 춘앵전을 만든 효성 깊은 세자 정도로만 알고 있을지 모를 효명세자의 짧은 삶엔 조선왕조의 비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것을 그대로 드라마로 만들면 누가 보겠는가. 그래서 여기에 연애를 살짝 넣어 시청자의 눈을 속인 후에 무겁디무거운 이야기를 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작가와 연출의 성향일지 아니면 드라마 제작국의 방향일지는 몰라도 이들의 전작인 <후아유>를 보면 그렇게 역사에 충실할 것이라는 기대는 사실 없다. 그러나 이런 드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로 의도의 여부와 상관없이 칭찬하고 싶은 심정이다.

KBS 2TV 새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조선에는 비극적으로 삶은 중단한 세자들이 몇 있다. 대표적으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들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아비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점이 더욱 아프다. 그렇지만 대리청정 4년차에 의문의 병사를 한 효명세자 또한 애통함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그나마 초기에 잡아보려 했던 효명세자였기에 이후 조선역사를 아는 우리이기에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효명세자의 죽음을 말하려면 먼저 그의 가계를 조금 더 살필 필요가 있다. 효명세자의 할아버지는 정조다. 그리고 정조의 아버지가 바로 그 사도세자다. 뭔가 비극적 냄새가 풍기지 않는가. 정조의 죽음도 그렇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정순왕후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 것이 대를 이은 비극의 악연이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 관련이 돼 있는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조선은 정조가 꿈꾸던 나라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됐으니 말이다. 결국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왕위에 오른 순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왕이었다. 그러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너무도 정확한 시대 묘사였다.

KBS 2TV 새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나는 아무 것도 못해.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돼.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 네가. 내가 왕이고자 할 때 2천명의 백성을 잃었고, 내가 왕이고자 할 때 중전을 잃었고, 나의 스승과 동무들은 모두 그렇게 떠나갔다. 못난 내가 내 사람을 잃지 않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그러나 드라마가 그렇듯이 역사에서도 한두 번의 반전 기회는 오는 법이다. 순조와 효명세자도 다르지 않았다. 바로 <구르미 그린 달빛> 3회에 그려진 대리청정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 대리청정을 선언하는 풍경이 좀 이상했다. 신하들은 한두 번 안 된다는 말을 했지만 왠지 건성 같아 보였고, 세자 또한 지금껏 봐왔던 대리청정을 대하는 모습과 전혀 딴판이었다.

보통은 왕이 대리청정의 뜻을 밝히면 세자는 목숨을 걸고 대죄를 하며 뜻을 거둬달라고 하는 것이 익숙한 사극의 풍경이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의 덫에 걸려 죽음에 이르게 되지 않았던가. 또한 태종이 선위를 언급할 때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민무구, 민무질의 표정에 웃음을 띠었다는 것이 사형의 주된 이유가 됐을 정도로 살아있는 왕의 전위나 대리청정은 세자와 신하 모두에게 목숨 걸고 거부하는 모양새를 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KBS 2TV 새 월화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그런데 심지어 영의정은 “세자의 뜻만 확고하다면 이보다 기쁜 일이 없다”고 하는 지경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이렇다. 안동김씨들도 왕의 대리청정을 미리 알고 있었다. 실록에 보면 순조가 대리청정을 명한 날 곧바로 예조에서 길일을 아뢰었던 점을 봐도 안동김씨들은 이미 순조의 대리청정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30대의 왕성한 순조도 허수아비로 만들었는데, 스물도 안 된 세자는 더 쉬울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순조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대작전은 안동김씨의 전횡에 맞서는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으니 부자의 절묘한 콤비 플레이라 할 수 있고, 군신 간에 서로 다른 꿈을 꾼 동상이몽의 한 수였다. 그러기에 효명세자의 죽음이 더욱 안타깝게 되는데 드라마에서는 거기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그 비극을 가슴에 담고 과정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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