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문 일색’이라고들 한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결과에 거의 모든 언론이 같은 분석을 내놓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 지지자들이 일사불란하게 투표해 그들이 밀던 추미애 후보를 당선시키고 최고위원까지 ‘싹쓸이’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새누리당 전당대회 결과와 비견되며 ‘친박 대 친문’의 구도 속에서 소외된 이들이 제3지대에 모일 수 있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고 있다.

정치는 생물이기 때문에 정계개편이 실제로 일어날지, 그리고 그 파장의 정도와 방향은 어떤 것일지 지금 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큰 흐름 속의 작은 움직임을 보는 섬세한 시각도 필요한 때다.

‘친문 일색’이고 ‘도로친문당’이 됐다고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방법이 있었는지 의문이다. 당내에서 충돌을 반복해왔던 이들이 국민의당으로 따로 살림을 차려 나갔고 문재인 전 대표 이외의 차기 대권주자들은 당 내에서 의미 있는 조직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최고위원회 구성의 경우 과거 ‘주류’로 불렸던 흐름에 속하는 인사들만 있는 게 사실이나 차기 대권주자들을 기준으로 본다면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가 28일 저녁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8 27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최고위원 등 새 지도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친문’이 호출되는 것은 이제 ‘문재인 대세론’을 뒤집기는 어렵게 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전당대회 결과를 통해 드러난 당심으로 보면 이후 대선후보 경선에 박원순 서울시장이나 안희정 충남지사와 같은 이들이 참여할 수도 있겠으나 이들의 역할은 ‘페이스메이커’ 이상이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추미애 신임 대표가 전당대회 과정에서 반복해서 주장한 것은 강한 야당이 되어야 하고 3자구도가 형성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문재인 대표 우위의 구도를 끌고 가면 국민의당이나 정계개편의 결과로 탄생할 가능성 있는 어떤 정치세력과 경쟁해도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일 것이다.

실제 국민의당과 안철수 전 공동대표의 지지도는 지난 총선 이후 박선숙-김수민 의원 의혹이 터지면서 상당 부분 내려앉은 상태다. 최근 당 내에서 고성이 오가는 시끄러운 잡음이 이어지는 것도 이의 영향일 것이다. 당 내에는 안철수 전 공동대표를 중심으로 이대로 가자는 주장과 ‘제3지대’를 언급하는 새로운 이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담을 허물고 외연을 확장하자는 주장, 아예 분당 전의 과거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서로 교차하는 걸로 알려진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이 손학규 전 의원을 만나 막걸리를 마신 것은 외연확장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현재의 틀을 그럴듯한 방식으로 유지해야겠으니 여기에 들러리를 서달라고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손학규 전 의원 개인을 놓고 말하자면야 국민의당에 합류할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박지원 비대위원장이 구상하는 방식의 외연확장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외연확장이 되면 되는대로, 안 되면 안 되는대로 문재인 전 대표 입장에선 득을 기대할만한 대목이 없다. 도의로 말하자면 이제는 문재인 대표가 양보를 할 차례이며, 공학으로 말하자면 문재인 전 대표 중심의 후보단일화를 통한 1대 1구도 형성이라는 방식이 위력이 크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2012년에 경험했다. 그러니 문재인 전 대표 위주의 대선 기획을 조기에 발동시켜 정면돌파를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게 사실이다.

문재인 전 대표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차기 대선에서 제대로 된 여당 후보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거다. 친박 핵심들은 ‘반기문 대망론’을 밀고 있으나, 야권의 정치공학으로 보자면 이는 오히려 신기루에 가까운 것이다. 이외의 유력 대권주자들은 박근혜 정권의 서슬 퍼런 레임덕 방지 정책으로 인해 고사 직전의 위기에 몰려 납작 엎드려 있는 신세이다. 이런 판국이라면 오히려 국민의당이 여당 표 일부를 잠식하고 문재인 전 대표가 어부지리의 이득을 얻는 시나리오도 상상 가능하다.

‘이회창 학습효과’가 빛을 잃고 있는 건 이런 상황 때문이다. 2002년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나선 이회창 전 총리는 거의 5년 내내 대세를 유지하였으나 혜성처럼 떠오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밀려 패배했다. 이후 야권에는 노무현 효과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 유행처럼 번졌다. ‘바람’을 통한 역전이 일관된 안정적 스탠스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상황들 때문에 문재인 전 대표 지지자들은 이보다는 오히려 ‘박근혜 모델’을 따르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은 유력한 대권주자로 손꼽히던 시절부터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해 ‘대세론’을 대선 직전까지 유지했다. 이 당시에도 여의도 언저리에 ‘이회창 학습효과’가 회자됐고 야권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는 교과서적인 중도와 진보의 후보단일화를 이뤘음에도 박근혜 정권이 탄생하는 걸 막지 못했다. 즉, 이번 대선의 경우 문재인 전 대표도 대세론을 끝까지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면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공학적 판단이 영역은 차치하고서라도, 지금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 전 대표의 입장에서 ‘박근혜 모델’이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대세론은 보통 2가지 요소 때문에 지속된다. 첫 번째는 대세론의 수혜자가 갖는 어떤 안정감이 다른 대권주자들이 갖는 불안요소를 압도하는 경우다. 과거 고건 전 총리의 사례가 그렇고 현재의 반기문 대세론이 그렇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대세론은 그 주인공의 약점, 대개는 ‘내용이 없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대세론이 ‘대세’로 굳어지기 위해서는 두 번째 요소가 필요하다. 결국 내용의 문제이다. 여기서 내용이라는 건 ‘수권능력’으로 번역되는 어떤 합리적 통치성의 추구와 이의 일환으로 제시되는 일련의 화려한 정책 패키지의 필요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경우에 삶이 어떻게 변화할 거라는 인식을 유권자들이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 ‘부자되세요’라는 슬로건이 이를 대표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정확한 평가는 정권이 끝나고 할 일이지만 ‘대통령 집안의 일원’이라는 공공적 보증수표가 ‘원칙과 신뢰’라는 키워드와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치는 전임 정권에 대한 부정의 연속으로 유지되어 왔다. 국민의 정부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낡은 정치’를 벗어나지 못했고, 참여정부는 정치개혁을 쟁취했으나 국민의 삶을 양극화시켰다. 이명박 정부는 개혁이라는 허울이 아니라 각자의 실질적 이익을 보장해주겠다며 자기 이익만 챙겼고, 박근혜 정부는 사익추구로 점철된 정치 속에서 다시 ‘통치’를 부활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反)정치로 일관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문재인 전 대표가 ‘박근혜 모델’을 성공적으로 따르려면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한 정치의 힘을 다시 되살리고 대통령 자신 만을 위한 권력행사, 즉 ‘내용 없는 통치’를 끝장내야 한다. 통치가 실질적으로 국민들의 삶을 책임지고 더 낫게 만드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정치의 영역에서 증명해내야 한다. 원칙과 신뢰라는 대리주의(代理主義)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통치 비전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기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런데 ‘유능한 경제 안보정당’, ‘소득주도성장’ 등의 중도 공략에 맞춰진 구호들만으로는 유권자들에게 이런 차원에서의 믿음을 줬다고 말하기 어렵다. 즉,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게 중도든 진보든 누구를 대상으로 한 공략법이 아니라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이 가진 공적 소명이 무엇이냐를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추미애 대표 체제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문재인 전 대표를 대권주자로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려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느냐에 정치인 문재인의 운명이 달려있다. 권력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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