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지침 폭로 30년이 지났다. 감옥에 가서 재판을 받을 때, 첫째 아이가 돌을 맞이했다. 그 친구 나이가 벌써 서른이 됐다. 짧지 않은 세월이라 새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이 지난 한국 언론의 상황이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 언론의 자유가 많이 보장됐다고 과감하게 말하기 어렵다”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전 KBS이사)는 24일 숙명여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학회, 한국언론정보학회 주관 <보도지침 폭로 3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이 같이 말문을 열었다.

24일 숙명여대 백주년기념관에서 한국방송학회, 한국언론학회, 한국언론정보학회 주관 <보도지침 폭로 30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렸다.

당시 ‘말’지에서 보도지침을 공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86년 9월9일이었다. 김주언 전 기자는 같은 해 12월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구속된 뒤, 1995년 12월 9년여만에 대법원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언론통제의 실상을 드러냈으며, 1987년 6월 항쟁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김주언 전 기자는 “30년이 지나면서 정권도 많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KBS 보도지침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과거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서 정치권력의 언론통제가 방식만 바뀌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주언 전 기자는 “30년 전 당시 보도지침 사건이 터졌을 때, 보도 협조요청 사안이었다고 논리를 폈다. 이는 KBS 보도지침 사건에 정부여당이 대응하는 논리와 거의 일맥상통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에는 보도지침이 안 먹히면 신문사에서 쫓겨나거나 고문을 당하는 제재를 받았지만, 현재는 사퇴 압력을 받는다”면서 강도만 약해졌을 뿐, 사실상 보도통제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김주언 전 기자는 KBS 보도통제 사건이 단순 공영방송에만 집중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반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그런 식의 협조요청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그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2013년 정윤회 문건’ 사건을 꼽으며 “당시 세계일보가 후속보도를 하겠다고 했으나, 그 이후에 세계일보에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진행되고 편집장이 바뀌었다”면서 언론통제가 있었음을 암시했다.

김주언 전 기자는 “보도지침 폭로 30년이 지났지만, 이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 일처럼 언론 보도지침이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에 참담함을 느낀다”고 개탄했다.

6월 30일 기자회견을 열어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던 이정현 의원의 보도통제 녹취록을 공개하고 있다.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는 김시곤 전 KBS 국장을 설득해 녹취록 공개를 이끌었다. (사진=언론노조)

같은 날 발제를 맡은 조항제 부산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진보정부가 들어선다면 지금 제기 되고 있는 문제들이 깨끗하게 해결될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뒤, “정권이 바뀌어도 홍보수석은 있을 것이고 공영방송에 대한 권력통제는 지속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치권력의 언론통제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조항제 교수는 “이정현 전 홍보수석을 포함 언론통제 당사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낄 가능성은 전무하다”면서 보도지침이 반복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현재 대책으로 나온 공영방송지배구조 개선안이 만능은 아니라면서 “첫 삽을 뜬 것뿐이다. 진보 정부가 들어선다면 정말로 고민을 잘해야 후대에 누가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공영방송지배구조 개선안은 정치권력의 언론 통제를 막기 위한 대책이다. 하지만 현직기자 입장에서는 정치권력보다 언론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본 권력이 더 문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문소영 서울신문 사회2부장은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정치권력의 언론통제는 상대적으로 나아졌다면서 오히려 자본권력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문소영 부장은 “정치권력과 싸우는 것은 구도가 명확해 싸움이 잘된다”면서 “하지만 자본과의 싸움은 너무 지난하고, 여론의 관심을 받지 못해, 답이 없고 판판히 깨진다”고 지적했다.

문소영 부장은 언론이 자본통제로부터 자율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문 부장이 현직 기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자본에 대한 언론의 독립성은 권력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문 부장은 “언론에서 기업의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안 들어주면 언론사가 곤란해지는 쪽으로 저울추 자체가 넘어갔다”고 지적했다.

토론자로 참여한 이봉현 한겨레 미디어전략부국장은 “오늘날 정치 권력보다 자본 권력과의 싸움이 어려운 상황인데, 과연 싸워봤냐고 물어보고 싶다”면서 경제권력과 싸우기 위해선 최소한의 원칙을 세우고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필모 KBS해설위원은 전문직주의와 직업윤리를 강조하며 “기자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윤리가 확보되지 않으면 정치에 따라 휘둘리고 쉽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홍원 부산대학교 신문방송학교수는 “수익을 잘 내는 언론사가 공익성도 잘 실천한다는 연구 사례도 상당히 있다”면서 “퍼블릭펀딩(Public Funding)이 활성화되면 지금보다 더 언론의 공적 기능이 강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안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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