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에서는 정치적인 그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내세우는 올림픽이라는 점에서 이는 타당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미 자본에 종속된 올림픽에서 순수라는 단어는 어울리지는 않는다. 정치적인 수단으로 올림픽을 사용한 역사 역시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故 손기정· 남승룡 옹과 릴레사, 그들이 보인 침묵의 세레머니 공통점

히틀러는 올림픽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홍보 수단으로 활용했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하게 평가받고 있는 다큐멘터리 중 하나가 바로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이기도 하다.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도 전 세계는 정치적 이념 갈등으로 올림픽 보이콧을 하기도 했다.

올림픽이 이렇게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된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올림픽이라는 무대가 전 세계인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무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록은 존재한다. 일본에 지배당하던 시절 우리 선수들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물론 나라를 잃은 국민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는 없었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장기를 달고 마라톤에 출전했다. 마라톤 신기록을 세운 손기정은 금메달을 남승룡은 동메달을 따내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올림픽 시상식 자리에서 그들은 웃지 않았다. 가장 값지고 행복한 그 순간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나라 잃은 국민들의 설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제7전시관 특별기획전시실에서 광복 71주년 특별기획전이 개최됐다. 사진은 제11회 베를린 하계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에서 손기정(가운데)과 남승룡이 수상하는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히틀러의 화분은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에게만 주어졌다. 그렇게 손기정은 금메달을 딴 후 월계관을 쓰고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린 채 가장 높은 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동메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화분. 어쩔 수 없이 일장기를 그대로 노출할 수밖에 없었던 남승룡은 그 순간이 가장 서글펐다고 한다.

남승룡이 가장 부러웠던 것이 손기정의 금메달이 아니라 화분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라를 잃은 청년들은 그렇게 전 세계에 자신들을 알렸다. 화분으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었던 손기정이 너무나 부러웠다는 남승룡의 회고는 그들이 당시 느낄 수밖에 없었던 분노를 엿보게 한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는 육상 남자 200m 결승 시상식에서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미국의 흑인 선수 토미 스미스, 존 카를로스가 고개를 숙인 채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로 내뻗는 일이 있었다. 마치 베를린 올림픽의 두 영웅 손기정과 남승룡처럼 말이다.

두 흑인 선수가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하늘로 뻗은 이유는 미국 내에서 태동하던 흑인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경례 방식이었다. 이는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적인 세러모니 '블랙 파워 경례' 사건이다. 흑인 인권 운동 태동하며 흑백 갈등이 더욱 심화되던 시기 두 메달리스트가 보인 이 행위는 전 세계에 미국 내 흑백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널리 알린 사건이었다.

당시 은메달을 땄던 호주의 백인 피터 노먼은 검은 장갑을 끼고 '블랙 파워 경례'를 하지는 않았지만 OPHR 배지를 달고 그들의 뜻에 동참하기도 했다. 2006년 피터 노먼이 사망하자 멕시코 올림픽 당시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한 스미스와 카를로스가 참석해 그의 관을 들고 곁을 지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피터 노먼의 날을 제정해 흑인 인권 운동의 가치를 기리고 있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이런 일은 이어졌다. 헤비급 복싱 호주 대표인 20살의 데미언 후퍼는 32강전에서 유니폼 대신 호주 원주민(애버리지니)을 상징하는 표장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출전했다가 IOC의 조사를 받았다. 호주에서 심각하게 자행되는 원주민 핍박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페이사 릴레사가 남자 마라톤 피니시라인(왼쪽)과 마라톤 메달 시상식에서 두 팔을 머리 위로 엇갈려 X자를 표시하고 있다. 릴레사는 "에티오피아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을 반대하는 의미다. 나는 평화적인 시위를 펼치는 반정부 시위대를 지지한다"라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자료사진]

2016 리우 올림픽에서도 이런 역사는 재현되었다. 에티오피아의 마라토너 페이사 릴레사는 결승선을 통화하며 자신의 손으로 엑스자를 그리는 세레머니를 했다. 그가 그런 행위를 했던 것은 에티오피아 정부의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반대의 표시였다.

"나는 이제 에티오피아로 가면 죽거나 감옥에 갇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릴레사가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고 했던 이런 세러모니를 펼친 이유는 에티오피아 오로미아 지역에서 반정부 시위에 나선 주민 1천 명 이상이 경찰의 강경 진압에 죽거나 투옥된 사건 때문이었다. 한 마라토너의 몸부림에 의해 에티오피아 정부의 잔인한 학살 사실이 전 세계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죽음까지 무릅쓴 그의 용기에 세계인들이 나섰고 그를 위한 성금이 모이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면 죽거나 투옥될 수밖에 없는 그와 그의 가족을 살리기 위한 세계인들의 움직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은메달은 에티오피아가 이번 올림픽에서 딴 8개의 메달 중 하나였다.

올림픽은 세계인들의 스포츠 축제의 장이다. 이런 공간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자체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정치적 행위가 만연하게 되면 올림픽이 어떻게 활용될지는 누구라도 예측 가능해지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행동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대한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마지막 선택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손기정과 남승룡,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 피터 노먼과 데미언 후퍼, 그리고 페이사 릴레사까지 그들이 스포츠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무대에서 자신의 안위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침묵의 행위는 그 무엇으로도 폄하될 수 없는 가치라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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