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운영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나만 이렇게 통탄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판단을 같이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에 적잖게 놀란다. 최근에 이런 심증을 더욱 굳히게 만드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가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문제고, 다른 하나가 한편으론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을 봉쇄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베끼는 사건이었다.

앞의 사건에서 애초 산업자원부 담당 과장은 누진제 개편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합리적인 문제제기의 측면이 많기에 충분히 검토하겠다고 할만도 한데 단호하게 잘라 버렸다. 그러다가 누진제 개편을 위한 당정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우리 같은 개, 돼지는 찜통 더위에 쩌 죽으라는 거지!’라는 비아냥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태도를 표변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능구렁이 관료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뒤의 사건에서는 한 부처를 병신 만들면서까지 야당의 정책을 봉쇄하려는 후안무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보건복지부로 하여금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에 대해서는 직권 취소시키는 한편으로, 그런 지 며칠 만에 고용노동부는 서울시의 청년수당 도입과 오십보백보인 정책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보건복지부는 끝까지 직권취소를 고집했고, 결국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 도입 여부는 법정으로 가게 됐다. 보건복지부는 ‘병신’이 됐고 조롱거리가 됐다. 이 과정에 충실했던 한두 명의 관료는 현 정권이 재생산되는 한 출세가도를 보장받았을지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보건복지부로부터 직권취소 조처를 받은 청년수당에 대한 서울시 입장을 담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모두 다 집권여당이 총선에서 참패하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내부 권력투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에 벌어진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작동을 안 해도 너무 안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나마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표를 의식해 잽싸게 변신하고 베끼는 길이라도 선택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점점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예상과 달리,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집권여당이 일찌감치 매를 맞으며 보약을 먹었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근데 아무래도 보약을 잘못 먹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병우 감싸기’ 행태를 보면, 김현철을 감싸다 곤경에 빠진 YS 문민정부가 떠오른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그때 김현철 의혹은 <한겨레>가, 지금 우병우 의혹은 <조선일보>가 파헤치고 있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으로 향하는 공무원 계층의 표가 상당할 것으로 나는 봤다. 공무원 표를 잡기 위해 ‘정년 연장’이라는 회심의 카드까지 던졌으니 충분히 그렇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최소한의 자율성도 없이 장관이나 차관이 과장급 인사발령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하고 윗분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분위기에 관료사회가 굉장히 주눅 들어 있다는 분석을 접할 수 있었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분석이고 충분히 수긍할 만했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사건은 이런 분위기가 바뀌기는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청년수당 정책 ‘봉쇄와’ 베끼기는 그 자체로 청년층으로부터 인심을 잃는 효과가 크다. 베껴서라도 일부 도입했으니 그나마 청년층에게는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년층의 인심을 얻기는 애초 틀렸다. ‘줄 거 다 주고 욕먹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색내기용 베끼기’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데다, 너무나 속보이는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의 이중적인 행태는 ‘부처 간 협의도 개판’이고 혀만 차게 하는 몰골이기에 더욱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청와대-세종청사간 을지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리아 난민 문제는 브렉시트까지 이어진 유럽 난민 사태의 직접적인 진앙에 해당한다. 그것만 보더라도 한 국가가 대책 없이 무너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북한이 붕괴될 경우 한반도 주변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반면교사로 삼기에 부족하지가 않다.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마담 프레지던드는 ‘통일 대한민국’을 언급하며 북한의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를 내비치는 발언을 최근 했다고 한다. 김정은 정권의 정당성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으면서, 김정은 정권이 대책 없이 붕괴하는 것 역시 결코 바라지 않는 내게는 당혹 그 자체다. 북한 핵미사일의 위험에서 대한민국을 보호하겠다고 하면서 정작 수도권은 쏙 빼놓는 모습에서 느꼈을 수도권 시민들의 당혹감과 비슷했을 것이다.

브렉시트가 유럽연합 안 빈부격차, 시리아 난민으로 상징되는 난민 문제, 대처 이후 금융자본 중심의 산업 변화에 따른 영국 실물경제 위축, 이 과정에서 보수당의 분열 등이 누적되면서 나타난 영국 시민들의 선택의 결과라면, 우리나라에서도 보수적인 정당이 분열할 가능성은 이미 차고도 넘치는 듯하다. ‘보수는 혁신’이라고 하면서 찾아볼 수 있는 새로움이라곤 사드를 매개로 한 신종 종북몰이밖에 없으니 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브렉시트가 점점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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