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일보>가 ‘오랜만에’ 탤런트 고 장자연씨 자살 사건을 대서특필했습니다.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 다음날인 지난 25일이었습니다. 1면 사이드 기사와 함께 8~9면을 털고 사설까지 동원해 도배를 했습니다. 그 많은 내용 가운데 7할이 조선일보의 “자사 특정 임원”과 관련한 내용이었습니다. 다른 언론들이 ‘○○일보 ○ 사장’이라고 표기해왔던 바로 그 인물 말입니다. 그동안 조선일보는 “자사 특정 임원”이 장자연 리스트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한 차례도 스트레이트 기사로 보도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네가 국회의원 아무개 아무개와 일반시민 아무개 등을 고소했다는 기사나, 자사 임원에 대한 터무니없는 모함인 게 밝혀지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할 것이란 경고성 칼럼(김대중 고문 ‘조선일보의 명예와 도덕성의 문제’) 정도가 있었을 뿐입니다.

▲ 한겨레 4월27일치 10면 머릿기사 이미지
조선일보가 “자사 특정 임원” 관련 내용을 느닷없이 보도하기 시작한 것은 그 인물에 ‘무혐의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라는 걸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 속내가 무엇이었든, 조선일보의 이런 보도 방식은 보편적 저널리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 있습니다. 무엇을 해설/분석/비판하든 자유지만, 그 대상과 관련한 스트레이트 기사가 먼저 있는 게 상식입니다. 수사 발표 보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 규명해야 할 의혹들을 앞서 보도해야, 수사 결과 보도도 그 의혹들을 중심으로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든 해설/분석/비판 기사를 쓰든 할 거 아니겠습니까. 조선일보에는 있어야 할 그게 정확하게 빠져 있습니다. 자신들만 없는 게 아니라 남들이 그걸 말하는 것조차 막으려 해왔습니다. 하나 더. 경찰 발표 내용에도 들어 있는 ‘조선일보 고위 임원 아들 술자리 참석’ 내용도 이번 보도에서 쏙 빠져 있습니다.

언론은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고 수사기관은 혐의를 포착해서 수사를 합니다. 언론이든 수사기관이든 사회로부터 공적기능을 수행하는 집단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사실과 진실을 자의적으로 취사선택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 체계는 입맛에 맞는 사실과 진실만 골라서 보도하고 수사하는 것을, 취사선택한 사실과 진실 자체를 비트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게 합니다. 물론 언론과 수사기관이 모든 사실과 진실을 빠짐없이 보도하고 수사하라는 요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이들 기관의 ‘무한 스팩’을 전제하는, 공상계에서나 가능한 요구일 뿐입니다. ‘취사선택’은 불가피합니다. 그래서 사회가 이들 기관에 요구하는 건 최대한 공공적인 것들을 선택해 최대한 사실과 진실에 부합하게 보도/수사하라는 것입니다.

공공적인 것이란 정의에 관한 것이며, 이 가운데서도 사회적 약자의 인권은 공적 정의의 대표적 항목입니다. 이를테면 성 상납을 강요받은 여성 탤런트가 자살에 앞서 작성한 문건 안에 거대 언론사의 “특정 임원”의 이름이 들어 있다면 언론은 이를 보도하고 수사기관은 수사를 해야 합니다. 어쩌다 그 문건 안에 “특정 임원”의 이름이 들어갔는지가 핵심일 것입니다. 물론 언론에게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든지, 알권리와 명예의 가치가 경합하는 실명 보도에 대한 신중한 접근 등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장자연 리스트의 “특정 임원”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보도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침묵’과 ‘선전’이라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을 유체이동 하듯 순식간에 오갑니다. 경찰은 어떻습니까. 수사기관은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먼지까지 탈탈 떠는 게 생리인데, 수사 결과 발표 전날 방문조사를 했다는 “특정 임원” 수사는 오히려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수사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걸 세상은 ‘봐주기 수사’라고 부릅니다. 감시의 눈이 없었다면 그나마 방문조사라도 했을까요.

▲ 임마누엘 칸트
임마누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신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이름붙였습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던 천체의 운행을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도는 것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칸트는 이것에 착안해, 인간의 인식이 외계의 대상을 감각으로 받아들여 반영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순수이성 안에 선험적으로 내재된 인식능력(오성)이 외계의 사물을 구성하는 것으로 뒤집어놓았습니다. 타당성을 떠나, 그의 인식론이 성립하려면 순수이성/오성이 사람마다 달라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과 진실을 모두 보도/수사할 수 없다는 근본적 한계는 언론과 수사기관에게 보도/수사 대상의 취사선택 문제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순수이성/오성이 사람마다 달라서는 안 되듯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믿는 공적 가치를 배반하는 취사선택은 혼란을 낳을 뿐입니다. 저들의 패악질에 비하면 제 문제의식이 너무 헐겁고 공허한 걸까요?

2.

<미디어스>가 오늘(4월27일) 사이트 개편을 단행합니다. 2007년 10월10일 창간 뒤 첫 개편입니다. 미디어스의 그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믿으며, 아직은 미약한 1년6개월에 애벌레(미약)에서 나비(창대)로 성장하기 위한 첫 탈피를 하는 것입니다. 탈피는 내용의 아날로그적 성장이 형식의 디지털적인 변환으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생존을 위한 자전과 성장을 위한 공전의 궤도를 동시에 운행하며 이제 첫 탈피가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애벌레가 처음부터 나비의 꿈을 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한동안 우리의 정체성과 지향을 놓고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듭했습니다. 그 성장통이 이번 개편에 얼마간 담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고민과 시행착오, 미래의 전망은 대문 화면 맨 아래에 있는 ‘미디어스 소개’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현재를 정보통신기술 진화에 따른 미디어 환경의 격변기라고만 보지는 않습니다. 봉건적인 언론 탄압과 근대적 언론의 해체가 공존하는, 오래된 미래와 낯선 과거가,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열쇳말인 시대입니다. 드러나는 현상은 극도의 혼란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라 복잡성입니다. 지금은 해체와 정립, 저항과 대안 제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고, 또한 적극 모색되어야 하는 과도기입니다. 개편된 사이트에 이런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현장성과 기획성이 유기적인 질서를 형성할 수 있는 형식화를 시도했습니다. 깊이 있는 비평과 발랄한 상상이 경합하며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고정물들을 구성했습니다. 대중문화는 즐기면서 사유할 수 있는 장르로서, 이전보다 훨씬 활발하게 다루려고 합니다.

개편 시점은 2008 촛불 1주년(5월2일)에 맞춘 것이기도 합니다. 개편 전 프롤로그(촛불 1년, 위험사회서 별일 없이 살기)를 시작으로 촛불 1주년 특집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본 기획은 3부로 구성했으며, 오늘부터 격일로 게재합니다. 적은 인원으로 개편 준비 하랴, 특집기획 하랴, 우리 구성원들의 고생이 컸습니다. 그러나 그 노고보다는 결과물이 독자 여러분들의 기대에 크게 못 미칠까 두렵습니다. 다만 2009년 한국사회가 성찰과 행동의 한 해가 되는 데 작은 밀알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저는 앞으로 매주 한번씩 ‘데스크 칼럼’으로 꼬박꼬박 인사드리겠습니다.

안영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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