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전범기를 SNS에 올려 논란이 되었고, 이후 형식적인 사과문으로 후폭풍을 일으킨 소녀시대 티파니가 결국 출연 중이던 KBS 예능 <언니들의 슬램덩크>에서도 하차를 결정했다. KBS나 SM 양쪽 모두 현재 상태로는 하차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단 하루 이틀 만에 엄청난 하차요구 글이 슬램덩크 게시판을 뒤덮었으니 피할 수 없는 결정이라 여겨진다.

분명 티파니는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잘못했으며, 그 원인이 되기도 했고 위기관리도 엉망이었던 소속사 SM은 더 잘못했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그런데 티파니에게 쏠린 분노가 너무 과한 것 같다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지금 분위기상 오지랖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은 어떤 말을 해도 티파니에 대한 분노가 잦아들 것 같지는 않다.

8월 18일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When they go low, we go high." 화면 갈무리

그러던 차에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은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에 이 현상의 본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아무리 손석희라고 하더라도 세상만사를 꿰뚫는 진리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미 분노하고, 분노하기로 한 대중을 잠재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18일 JTBC 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은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깊이 생각해봄 직했다.

“우리가 정작 분노해야 할 그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말입니다”라고 말하는 손석희의 뒤편으로는 각종 신문의 헤드라인이 나열됐다. 사드부지 논란, 우병우 특검, 추경 심의 중단 여 압박, 새 둥지 튼 어버이연합, 위안부 재단 집행 본격화 등의 기사들이었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전기요금 누진제 문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문제 등등.

뉴스룸이 끝난 후에도 “우리가 정작 분노해야 할 그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말입니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무한반복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부끄러운 것인가 아니면 불쌍한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정작 분노해야 할 것들은 애써 외면한 채 걸그룹 멤버 하나 잡는 일에 혈안이 되었던 며칠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된다.

8월 18일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 "When they go low, we go high." 화면 갈무리

벌써부터 티파니를 용서하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정작 분노해야 할 그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말입니다”가 하도 마음에 걸려 더 이상은 티파니를 욕하지 못할 것 같다는 의미일 뿐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김수영의 시를 마음속에서 꺼내보기로 한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하략)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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