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5세 아동에 대한 무상보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누리과정은 박근혜 대통령의 2012년 대선 핵심 공약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 취임 후 약 4년이 흐른 지금도 누리과정을 둘러싼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와 지방교육청은 예산을 둘러싸고 매년 충돌을 빚어 왔는데, 2016년 마침내 사단이 났다. 무리한 누리과정 예산 배정으로 재정상 어려움을 겪던 지방교육감들이 결국 어린이집에 대한 누리과정 예산배정을 거부한 것이다. 정부는 결국 국회에서 논의 중인 추가경정예산안에 교부금 증액분 1조9000억 원을 누리과정 예산으로 사용하도록 배정했다. 그런데 이것이 내년 예산을 미리 당겨쓰는 형태라는 것이 문제다.

17일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8시30분까지 장시간에 걸쳐 진행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는 누리과정 예산에 대해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했다.

머니투데이에 따르면 송기석 교문위 예결소위 위원장은 "누리과정 어린이집 예산 부족분 1조8000억 원을 국고에서 신규 편성하는 것과 지방채 이자 국가채무상환 지난해 발생한 세계잉여금 1조2000억 원을 지방교육청에 지방체 상환에 사용할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새누리당이 반대했고 정부도 수용하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전히 정부여당은 누리과정에 대한 국고지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이번 추경에 편성된 교부금 증액분 1조9000억 원을 차라리 배정하지 말자는 강경한 의견도 나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누리과정 예산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할 뿐더러, 내년 예산을 당겨쓰는 것은 오히려 내년 누리과정 예산 배정에 대한 또 다른 부담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미 내년에 사용처가 정해져 있는 돈을 미리 받아 누리과정에 사용했는데, 누리과정 근본 해결에 대한 원만한 협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내년 지방교육청 예산파행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누리과정은 태생부터 '상위법 위반'이었다

누리과정 예산편성의 근본적인 원인은 법적문제에서 시작된다. 유아교육법 제2조에 따르면 유치원은 유아의 교육을 위해 설립·운영되는 학교를 말하고, 영유아보육법 제2조에 따르면 어린이집은 보호자의 위탁을 받아 영유아를 보육하는 기관을 말한다. 정확하게 따지면 유치원은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교육부의 소관이 되고, 어린이집은 보육기관으로 보건복지부의 소관이 된다.

▲누리과정은 교육부와 보건복지부 중 어느 부처의 소관일까. ⓒ미디어스

이처럼 소관부처가 다름에도 정부는 누리과정을 뒷받침하는 시행령을 제정해 지방교육청을 압박했다. 지난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제34조 제3항에 따라 제22조 제1항 제1호의 영유아 무상교육 실시에 드는 비용은 예산의 범위에서 부담하되,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 다른 보통교부금으로 한다"는 내용의 영유아보육법시행령 개정을 강행했다. 보육을 규정하는 법에 교육을 끌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애초에 이런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는 목소리도 높다. 박근혜 정부가 누리과정을 시행하기 위해 개정한 것들은 결국은 모두 시행령이다. 법 적용 원칙에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이 있는데, 이에 따라 정부의 시행령은 영유아보육법·유아교육법에 우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박근혜 정부가 누리과정 예산의 재원으로 삼고 있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제1조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교육기관 및 교육행정기관을 설치·경영함에 필요한 재원의 전부 또는 일부를 국가가 교부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보육에 대한 예산을 이 법을 근거로 편성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나몰라라' 정부에 지방교육청 재정은 '초토화'

하지만 지방교육청들은 어떻게든 누리과정을 시행하려는 노력을 다했다. 사실 복지에는 누가 먼저랄 것이 없기 때문에 어느 부처의 소관인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지방교육청도 이런 관점에서 지난해까지 누리과정 예산을 무리해서 편성해왔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의 누리과정 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리는 모습. (연합뉴스)

그런데 우리나라 유치원의 수는 2014년 4월 기준 4619개인 것에 반해 어린이집은 지난해 기준 4만2517개인 것으로 나타나, 어린이집의 수가 유치원의 무려 10배에 달한다. 애초에 지방교육청에서 담당하는 유치원 관련 예산에, 무리하게 10배에 달하는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추가하다보니, 지방교육청 재정에 큰 피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전국의 지방교육청은 2015년에는 추가 6조원의 지방교육채를 발행하면서까지 누리과정을 시행했고, 2016년 현재 14조 원이 넘는 지방교육채를 떠안고 있다. 2016년 지방교육채 상환액만 5000억 원이 넘는 최악의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의 누리과정 예산에 대한 예측이 빗나간 것도 한 몫 했다. 정부는 현재 누리과정 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이 2015년에 49조5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는데, 실제로는 10조 원 가까이 감소된 35조 원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부담은 고스란히 지방교육청에 전가됐다.

시·도교육감협의회 "누리과정 대통령과 국회가 나서달라"

18일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회장 이재정)는 국회정론관에서 누리과정 문제의 근본적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유성엽 국회 교문위원장(국민의당),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 민병희 강원도 교육감, 김석준 부산광역시 , 조희연 서울특별시 교육감, 장휘국 광주광역시 교육감, 김승환 전라북도 교육감이 참석했다.

▲18일 오후 1시30분 국회 정론관에서 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가 누리과정 문제의 근본적 대책마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전국 시·도교육감협의회 제공)

교육감협의회는 "전국의 시·도 교육청은 현재 최악의 재정위기를 맞고 있다"며 "정부는 잘못된 세수 추계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정책에 대한 반성 없이, 중앙정부와 교육청, 교육청과 시·도의회, 교육청과 교육청, 교육청과 어린이집, 유치원과 어린이집 간의 갈등과 대립만 부추겨 왔다"고 전했다. 이어 "더욱이 정부는 상위법률을 어기는 시행령을 남발함으로써 스스로 법질서를 파괴해 교육재정의 심각한 부채 구조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교육감협의회는 "정부는 추경 편성된 1조9000억 원의 지방교육재정교부금으로 누리과정 편성을 강제하고 있다"며 "이번 추경예산은 2017년도와 2018년도에 반영해야 할 교부금을 미리 앞당겨 반영한 것에 불과해 예산운영의 기본적 원칙을 저버린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누리과정 해결에 있어 지금과 같은 임시방편 처방은 상처와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할 뿐, 국민화합과 교육 및 복지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며 "추경관련 기존 방침을 철회해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는 것은 물론 교육재정의 근본적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감협의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선 과정과 취임 이후 국민에게 약속한대로 책임지고 누리과정 예산을 별도 재원으로 확보해야 한다"며 "이것이 국민에 대한 대통령의 신뢰정치의 출발"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국회는 총선 민의와 지방교육재정 위기 상황을 분명하게 살펴 주기 바란다"고 전했다. 정부와 국회가 누리과정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 전면에 나서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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