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때 아닌 건국절 논란이 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8·15 광복절 축사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축사 시작부터 "건국 68주년"이라는 말을 해 논란을 자초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안중근 의사께서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 유언을 남기셨다"고 말해 자신의 부족한 역사인식을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건국 원년에 대한 논란이 비화되자 새누리당은 이를 정쟁화시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는 아예 광복절을 건국절로 공식화하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17일 열린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정진석 원내대표는 "진영논리로 건국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기 바란다"고 말했고, 심재철 의원은 "이 부분(건국절)을 법제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나경원 의원도 "광복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축소하는 일"이라고 비판했고, 정갑윤 의원은 "제가 18대 국회에서 건국절 관련 법안을 발의했었다"며 자랑스럽게 밝히기도 했다. 앞서 김용태 의원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도 광복절 경축사 당시 '1948년 건국론'을 언급했다"고 주장했다.

야당은 즉각 반박에 나섰다. 김홍걸 전 더민주 국민통합위원장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건국이라는 표현을 쓰신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로운 민주주의의 기반을 한 나라로 만들어가자 하는 표현으로 쓰신 것"이라며 "두 분 모두 1948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라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는 시도는 안 된다는 얘기를 하셨다"고 잘라 말했다. 문재인 전 더민주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 직후 "얼빠진 주장"이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건국절? 이승만 대통령이 지하에서 통곡한다

1948년 8월15일이 건국절이라고 주장하는 중심에는 뉴라이트 학자들과 일부 보수세력이 있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면서, 이 전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격상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면 그의 행보를 존중해야 하는데, 이들은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어 보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한 이승만 전 대통령. 왼쪽부터 맥아더 장군, 이승만 전 대통령, 윤치영 전 내무부장관. (연합뉴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임시정부 초대 국회의장 당시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며, 이날이 29년만의 민국의 부활일이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요, 이 국회에서 탄생되는 민국정부는 완전히 한국 전체를 대표한 중앙정부임을 공포한다"고 밝힌 바 있다. 뉴라이트와 일부 보수세력의 주장과 전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아울러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광복절 정부 출범 행사를 대한민국 건국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이라고 명명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당시 우리정부의 관보 제1호는 발행 일자를 '대한민국 30년 9월 1일'로 표기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가 1919년 출범한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제작된 대한민국 관보 1호.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명시돼있다. (자료=국가기록원 홈페이지 캡처)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 취임사 말미에도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명확히 말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투철한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히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 진의를 왜곡하는 것은 건국절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정부여당과 뉴라이트를 비롯한 보수세력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후손들의 왜곡된 역사인식을 알게 된다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계승은 헌법에 나와 있다

우리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명확히 나와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3·1운동으로 세워진 임시정부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건국절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우리 헌법을 철저히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헌법은 한 국가의 근간을 세우는 법이기 때문에 깊은 역사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역사는 민족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민족사'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민족이 살아온 과정 자체가 우리의 역사라는 뜻이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우리 임시정부는 국가의 구성요소인 영토와 국민을 갖지 못한 망명정부였다"며 "정통세력은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 선생이라는 주장이 팽배했다"고 비판했다. 즉 우리 헌법에 나오는 임시정부는 형식적인 것일 뿐이기 때문에 1948년 건국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 (자료=국가법령정보센터 캡처)

그런데 정진석 원내대표의 발언을 뒤집어 보면, 당시 한반도에 있던 우리 선조들은 임시정부의 국민이 아닌 일본제국의 신민이었다는 위험한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일제 식민지 36년에 정당성을 부여하겠다는 것으로 들린다.

백 번 양보해서 일부 보수세력의 말처럼 1948년에서야 우리가 비로소 국민, 영토, 주권을 갖췄다고 해도, 우리가 건국을 말하는 것은 단순한 국가의 3요소를 갖췄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민족 공동체 형성의 서사를 어떻게 구성하고 기념할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건국절 주장은 "북한 인정해주는 셈"

건국절을 인정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대북관계에서도 심각하다.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를 보면, 처음부터 한 개의 임시정부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해임시정부와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 손병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국민의회, 서울의 한성정부가 있었다. 그리고 이 3개의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됐다. 그리고 이 명맥을 우리가 잇고 있는 것이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사진. 아래 쪽에 '대한민국 3년 1월 1일'이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이런 부분을 '건국절'이라는 명목으로 파괴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북한과 함께 광복 이후 건국한 국가로 '동급'이 된다. 정통성이라는 명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 헌법은 1948년 건국한 국가의 헌법이 돼 버린다.

우리에 앞서 북한이 위원회를 조직해 실질적 정부수립을 했기 때문에 38선 이북의 영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우리 영토는 38선 이남으로 축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국가보안법은 위헌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북한에 대해 국내법에 각종 규제 법안을 만들 근거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보수가 민족사 축소하는 황당한 상황

'이념은 스펙트럼과 같다'는 말처럼 다양한 사상적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스스로를 보수나 진보라고 규정할 때에는 최소한의 지켜야할 가치가 존재한다. 그런데 건국절을 주장하는 일부 보수세력은 스스로가 보수의 가치를 포기하고 있다.

▲지난 15일 광복절 축사하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은 건국절 논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연합뉴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방법에는 정치·사회·경제적으로 여러 기준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민족'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말하려면 민족이라는 것에 대해 강한 자긍심을 갖고 행동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건국절을 주장하는 일부 보수세력을 보면 스스로가 민족의 의미를 축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광복 직후 이승만 전 대통령, 김구 선생, 김규식 선생 등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보수로 분류됐던 가장 명확한 기준은 '민족주의자'라는 점이었다. 그런데 자칭 보수라는 세력이 스스로 보수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통일대박'이라는 말을 하며 보수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해왔다. 건국절 논란을 일으킨 박근혜 대통령이 반성의 시간을 가지면서, 보수와 민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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