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소폭 개각을 단행했다. 임기 종반부의 사실상 마지막 개각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관심이 쏠렸지만 사실상 하나 마나한, 그야말로 ‘마지못해’ 하는 개각이 돼버렸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 된 또 하나의 포인트인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는 역시나 건드리지 못했다. 특별감찰 이후 거취 결정 가능성이 점쳐지지만 청와대 주변의 반응을 볼 때 결국 버티는 수순으로 갈 거라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이런 상황에 보수언론들까지 일제히 비판을 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17일 1면에 <民心과 먼 개각>이란 제목의 기사를 배치했고 3면에는 <黨·政·靑 모두 친박이 중심… ‘변화 없이 가겠다’ 완결판>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관료 및 대선 캠프 출신을 중용하면서 개각이 폭을 최소화시킨 것은 변화보다는 임기 후반기 국정 안정화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주장한 ‘탕평, 균형, 능력 인사’는 관철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는 거다.

조선일보 17일자 사설

특히 조선일보는 박근혜 대통령 임기 내내 이런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걸로 보인다. 조선일보는 이날 <이런 맥빠지는 개각> 제하의 사설에서 “규모나 내용 면에서 모두 개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면서 “이럴 거면 총선 후 넉 달을 뜸들이더니 개각은 왜 했느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는 “이번 개각을 보면 총선 참패 사실을 벌써 잊어버린 것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 “1년여 전 정무수석에서 경질되고 여당 경선에서도 떨어진 사람을 다시 장관에 기용하는 것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청와대가 여당을 묵살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새누리당의 앞날도 밝을 리 없다”는 등의 맹비난을 그야말로 쏟아냈다. 또 조선일보는 미국, 일본, 중국과의 관계를 놓고 좌충우돌한 외교안보라인이 유임된 것 역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정권 교체의 과도기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외교 안보팀을 발족시켜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중앙일보 17일자 사설

개각에 대해 박한 평가를 하는 건 조선일보 뿐 만이 아니다. 중앙일보는 이날 <감동 없는 ‘수첩’ 개각으로 국정 난맥 돌파할 수 있나> 제하 사설에서 “표출된 민심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는 걸 책임 있는 지도자의 도리라고 할 수도 없다”, “회전문 인사의 반복이다”, “국민을 하나로 묶는 메시지가 부족한 데다 꽉 막힌 정국을 풀어갈 참신성이나 의지를 느끼기도 어렵다”, “끝내 수첩 인사를 고집한다면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계파 수장으로 기억되지 않겠는가”라는 등의 문장을 동원해 비판했다.

동아일보 17일자 사설

동아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우병우 살리고 이정현 기죽인 ‘찔끔 개각’> 제하 사설에서 개각 인사가 이렇게 된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의 ‘청문회 포비아’ 때문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요구가 ‘탕평, 균형, 능력 인사’ 요구가 묵살됐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청와대가 5일만에 새 지도부 건의를 묵살했으니 또다시 여당을 청와대 하부기관처럼 대하겠다는 뜻인가. 박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인사는 앞으로 1년 반 임기도 ‘마이 웨이’ 국정 운영을 하겠다는 통보나 다름없어 우려스럽다”고 주장했다.

보수언론의 이러한 비판은 거의 틀린 말이 없다. 개각은 이미 4·13 총선 직후부터 예고돼 왔다. 4·13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은 그동안의 일방통행식 불통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통한 ‘협치’를 하라는 것으로 이해돼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 직후 언론사 편집국장 및 보도국장들과의 간담회를 통해 변화의 모습을 보이겠다는 취지의 제스추어를 취하기도 했다. 이후 개각에 이러한 점들이 반영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개각은 차일 피일 4개월이나 미뤄졌고, 그것마저도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듯’ 한 모양새다. ‘변화’는 말 뿐이고 그저 하던 대로 하겠다는 거다. 이러니 권력을 비호해 온 보수언론인들 흥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 큰 문제는 그동안 언론에 의해 ‘십자포화’를 맞아왔던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를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위의 동아일보 사설에는 “이번 개각의 인사 검증을 책임진 우 수석은 1300억 원대의 처가 부동산 거래 현장에서 관여한 사실에 대해 거짓말을 한 사람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대통령을 보좌할 자격이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동아일보는 특별감찰을 받는 사람이 정상 근무를 하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면서 언제까지 대통령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감쌀 것인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조선일보 17일자 4면

그간 보수언론들은 우병우 민정수석이 조만간 물러날 것으로 예상해왔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보는 것과 같은 기류가 형성되는 조짐이 보이자 다시 ‘진군 깃발’을 들어 올리는 모양새다. 이 문제를 맨 처음 제기한 조선일보는 이날 4면 <1173억에 나온 禹처가 땅…넥슨, 급매물을 153억 더 주고 샀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애초 우병우 처가 측이 넥슨이 산 가격보다 싼 값에 땅을 내놓았던 정황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에서 넥슨과의 또 다른 의혹의 주인공이 된 진경준 검사장에 대해 “검찰 내부에선 진 검사장이 검사장으로 승진하고, 요직인 법무부 기획조정실장 보직을 받은 것에 ‘우병우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도 썼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검찰 수사도 촉구했다. <검찰은 ‘우병우 비리 의혹’ 왜 수사하지 않는가> 제하 사설에서 “검찰은 통상 직접 증거를 사전에 확보하지 못해도 정황(情況)이 충분히 뒷받침하면 비리 수사에 나선다”면서 “기업이 훗날의 배려를 기대하고 검사에게 재산상 이익을 안겨줬다면 현금이 오가지 않았더라도 뇌물(賂物)로 간주할 수 있다. 대통령이 우 수석을 끝까지 감싸고 도는 이유도 알 수 없지만 검찰이 뚜렷한 정황을 보고서도 구경만 하고 있는 배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쓴 거다. 청와대가 단지 우병우 민정수석을 감싸고 도는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적극적으로 방어하기 시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조선일보의 이런 태도는 거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으로 비춰질 정도다.

보수언론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우병우 민정수석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단지 ‘효용’의 문제를 넘어선 어떤 불가피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매 순간마다 비선 의혹 등과 유사한 어떤 논란들에 시달려왔다. 7인회가, 문고리 3인방, 정윤회 씨 문제, 김기춘 비서실장, 우병우 민정수석이 다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어떤 공적 체계에 의한 의사결정 구조를 통하는 게 아니라 공작에 능한 어떤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방식의 통치를 지속하고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박근혜 정권의 특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냉소적인 정치 인식이다. ‘체계’ 같은 것은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고 오직 남는 것은 정치공작과 힘의 논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게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가 힘을 기술적으로 사용하는 게 정치라고 믿는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관이 무엇을 할 것인지 보다는 과연 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자신의 통제를 잘 따르는 ‘진실한’ 사람인지 여부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질적인 자신감 부족이다. 독재자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자신감 부족이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여기서 ‘자신감’이란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정치적 자신감이다. 이 자신감은 통치에 대한 철학이 뒷받침 될 때만 존재할 수 있다. 대통령이 정치적 자신감을 가져야 공적 체계를 신뢰할 수 있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스스로가 통치에 대한 철학이 없으니 남에게 의존하게 되고 사실은 필요하지 않은 과잉된 음모적 능력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병우 민정수석을 경질하지 못하고 개각도 최소한의 폭만 제한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어쨌든 늦었더라도 옳은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하다. 보수언론까지 전방위적인 비판에 나선 판국에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를 이대로 끌고 갈 이유가 없다. 특별감찰은 23일께 종료된다. 아직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 남았다. 하나마나 억지 개각은 그렇다치더라도 먼저 대통령의 잘못된 통치 방식부터 바꿔야 한다. 우병우 민정수석을 포기하는 것이 첫 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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