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북에서 태어났단 말이다. 게다가 강북 유행의 한 시간 빠른 첨단통신, 변두리 유흥 문화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꼭 한번 들러보고 싶어 하는, 숭고한 성지와도 같았던 청량리가 바로 나의 놀이터였다. 이건, 뭐 축구선수가 ‘전반전 실점 이후 하프타임 매타작이 후반전 역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일고찰’도 아니고. 함부로, 말해보겠는데 내게 패션은 삶 그 자체였다. 오 마이 패션 라이프~! 아이 러브 청량리~!

담담히 무엇 하나 온전히 가슴에 품어두지 않고, 망운지정으로 일관해 온 산만한 성격이지만, 난 내 삶의 2/3 이상을 나이키와 리바이스를 사랑하는 것에 바쳐왔다. 내게 나이키를 산다는 건, ‘JUST DO IT’한 세계시민적 삶의 태도로 만국 공통의 23번을 흠모하는 일과 같았고, 리바이스를 입는다는 건 두 마리 말이 끄는 세상으로 나아가리라는 적극적인 다짐과도 같았다. 그 뿐만 아니다. 어느 브랜드의 어떤 유행과 스타일도 우직한 CK의 고답스러운 폰트 디자인에 미치지 못한다는 세레나데식 믿음을 나는 한순간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표준화된 국제 감각의 첨단을 유지해왔다. 고로 마땅하다. 패션에 대해 내가 쓰는 것은, 인생을 복습하는 의미로다.

아담이 이브에 눈을 뜨는 본능적 시간을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것처럼, 애당초 내겐 빨간 텝의 마술사, 501의 ‘간지’가 있었다. 거기다 초록색 에어맥스라도 신어줄 참이면. 그야말로 보도 블럭을 딛고, 간단히 중력의 법칙에서 이탈해, 날아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리바이스가 흔해질 무렵, 스톰과 닉스를 마주하며 경험했던 폭풍 간지의 돌풍적 위력은 그 뽐새 자체로 거리의 인파를 가를 수 있을 정도였다. 허리 사이즈가 아직은 28인치를 넘지 않을 마지막 무렵, NY96로고가 선명한 딱 붙는 흐린색 청바지에 밝은 색 라코스테 셔츠나 폴로 셔츠를 받쳐 입는 순간 맛보았던 앞선 자의 환희 역시 다시는 맛볼 수 없는 몸의 만족감이었다. 돌이켜보건대, 강북은 한 순간도 헐렁한 옷에는 은혜를 베풀지 않았었다. 패션에 자비란 없었다.

▲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던 강북패션 카툰
지척의 거리에 전국 최대 규모의 구제시장인 광장시장이 있다는 거리감을 어렴풋 깨닫기 시작할 무렵 당도한, 황토색 면바지, 리갈 구두, 체크무늬 셔츠 그리고 팔꿈치가 덧대진 재킷은 지금 봐도 ‘뉴요커’스럽다 아니 할 수 없는 강북 패션史의 명장면이었다. 그렇게 ‘글로벌’한 감각을 받쳐 입고 우린 경희대 앞 KFC에 모여 ‘로컬’하게 더 ‘알코올틱’하게 1차로 파전에 소주를 젖혀주고, 2차로 락카페를 쏘다녔다. 물론, 청소년보호법 이전의 얘기다. 당시를 강타했던 노래는 김현정의 ‘그녀와의 이별’이었다. “잊지 않았어, 그녀의 일방적인 얘기들~나를 속이며 다른 사람 만나왔던 얘기들~~♬♪”

그러곤, ‘정장’ 만능의 암흑시대가 왔다. 이제야 말할 수 있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다양한 패션으로 뻗쳤던 촉수를 잠깐 지하세계에 가뒀었다. 올 블랙 정장만이 모든 힘을 설명하는 지극히 ‘강북’스러운 패권의 시대에 나 역시 잠깐 굴종했었다. 이신우, 레노마, 미소페 그리고 베르사체 따위의 각종 옴므 브랜드들, 청담동 컬렉션의 이월상품에 시선을 현혹당했던 강점기였다.

이 대목을 예리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자칫 강북 패션史에 돌이킬 수 없는 누를 끼치고 마는, 이해 불가능한 문제아가 되어 허탈한 배신을 짓게 될까 두렵지만, 이 부분 과감히 생략하겠다. 패션史 왜곡이라도 할 수 없다. 어찌되었건 한 가지만 말하자면, 우린 그 때도 쫄바지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는 지역적 기개를 갖고 있었다는 점만은 강조하고 싶다.(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옷이라도 동네 세탁소 아저씨의 손을 거쳐 밑단은 7인치의 규격 사이즈를 준수하는 ‘리폼’이 권장되었다.)

청량리 키드의 존재론적 참혹함을 어렴풋 깨달은 것은, 그러니까 수능 성적표를 받아든 그 순간이었다. 학교 안에서 학교 밖으로 튀어나가겠다는 동력만으로 모든 삶을 구성하던 역동성이 깨지면서, 강고하던 청량리 패션 피플들의 연대 역시 서서히 부서진 이름이 되었다. 너와 내가 함께 입던 모든 옷들이 더 이상 우릴 설명해주지 못하니 다른 사회적 자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쳐가며 나는 기숙사형 재수학원으로 직행했다. 이후 나는 푸른색 츄리닝과 목 늘어진 티셔츠에 실존을 감금당한 부질없는 하류 인생을 살았고, 대학 따위에 인생의 진실이 있지 않다는 것을 진즉에 깨달은 나의 동료들은 월 90만원 정도를 받고 하루에 12시간씩 동대문 의류상가에 감금되어 옷을 팔기 시작했다. 세계가 밀레니엄을 맞을 무렵의 일이었다.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이후 10년간 유행은 청량리 키드의 옷장에서 거짓말처럼 똑같이 한 사이클 똑같이 반복했다. 전국 모든 아이들이 브랜드 키드, 동대문 패션 피플이 되어가는 과정을 전국 유흥문화의 성지에 먼저 살았던 청량리 패션 피플들은 묵묵히 지켜봤다. 비록, 가슴골보다 뱃살이 먼저 두터워지기 시작한 나는 청량리 패션 피플로서의 빛나는 과거를 뒤로한 채, 펑퍼짐한 바지에 져지를 즐기게 됐지만.

이제와 새삼 부인은 날더러 촌스럽다고 하지만, 난 역사와 전통으로 촌스러워도 무방하다는 프리패스를 받은 유부남일 뿐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버리지 못해 찢겨진 커튼과도 같은, 나의 강북향기 진하게 나는 브랜드 옷들을 사랑한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었던 그 시절 나의 패션들을 흔적처럼 옷장에 걸어둔 채.

원래 <프런코>에 대해 썼어야 했는데, 고백하건대 난 그걸 한 번도 유심히 보지 않았다. 얼핏얼핏 그것도 흘겨만 봤었다. 왜냐고? 격동의 패션史, 욕망의 리얼리즘의 시간을 살아온 내게 그건 진짜 패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죽하면, <10아시아>는 ‘패션의 ‘ㅍ’ 조차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썼을까. 솔직히 별 재미없었다. 오히려, 한 문장 안에서 조차 발음이 헛갈린다는 질타를 받은 “진보한 디자인은 박수를 받고, 진부한 디자인은 외면당한다”는 이소라의 코멘트가 그래서 고도의 이중 전략, 은유적 메시지 전달 방식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여러분, 결국 이 모든 건 사기입니다. ‘진보’건 ‘진부’건 진실은 당신이 뭔가를 구매해야만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내게 패션은 한순간도, 꿈의 차림새가 아니었고, 디자이너 역시 결단코 꿈의 공장장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진보의 궁극이 스타일일 수밖에 없음을 믿는다. 하지만 역시 패션은 유독 독한 삶의 냄새를 풍길 수밖에 없는 무엇일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긍정한다. 브랜드 옷을 갖고 싶어 아예 마네킹을 들고 뛰던 범죄적 욕망의 포로였던 나의 청량리 키드들은 그 순간을 추억으로 술회하지만, 그 이후 한 순간도 그 욕망의 회로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 그 획일적 포로들을 대량 재생산하는 방식의 소비주의로써 패션이 대중문화의 대세가 되는 것이 나는 마땅치 않다.

색, 음, 맛이 사람을 멀게 한다는 노자스런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고루한 사람들에 질리면서도 내가 기꺼이 다시 그 시절 패션 피플들과 진정 어울릴 수 없던, 뭔가 찜찜한 까닭이, 바로 <프런코>에 있었다. 그건, 가짜란 말이다. 그런 서바이벌이라면 우린 끝내 노예에서 풀려날 수 없단 말이다.

그렇다. 독한 냄새를 거둬 낸 패션은 그 자체로 진부하다. ‘화려하게 더 화려하게’를 꿈꾸는 경쟁의 매트릭스에서 승리할 수 있는 디자이너란 현실에 없다. 환상을 박제화한 리얼리티의 양식이 리얼리즘이라면, 내가 청량리 피플들의 패션史를 대서사시라고 못 부를 까닭이 없다.

뉴욕에서 온 아이가 서울을 보며 영감을 얻는 디자인이란, 그래서 그럴싸한 환상일 뿐이다. 입을 수 없는 앙드레김의 진부한 흰백색이 유구한 민족의 혼을 상징한다고 선전하는 질 낮은 레토릭처럼 동아일보 벽면의 종이비행기를 보고 자유롭고 싶다는 꿈을 연상하는 것은 얼마나 몰 시대적인 착오란 말인가. 뉴욕의 감각에 서울이 지배당한다는, 미국의 포맷을 한국이 그대로 모방하는 스타일의 문제는 따로 얘기하진 않으련다. 목표가 청량리 패션의 전지구화도 아니라면, <프런코>는 애당초 존재하지 말아야 할 무엇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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