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에픽하이가 발매한 <魂 : map the soul>이라는 타이틀의 북앨범에 수록된 노래 세 곡이 KBS에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에픽하이의 멤버인 미쓰라가 자신의 블로그(mapthesoul.com)에 소식을 올리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빌리브(Believe)’는 특정단체 비방, ‘사이퍼(Cipher)'는 간접광고, ‘탑 건(Top Gun)'은 특정직업 비방이 부적격 판단의 이유다. KBS 심의실에 전화하여 간략하게 문의한 결과도 대체적으로 유사하였다. KBS 심의실 차장이라고 밝힌 이는 “‘빌리브(Believe)’는 심의에 대한 비방, 조롱이 문제였고, ‘사이퍼(Cipher)’는 에픽하이가 차린 회사(mapthesoul.com)를 소개를 했기 때문에 부적격 판정을 받았고, ‘탑 건(Top Gun)’은 가사가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 에픽하이 멤버 미쓰라가 블로그에 올린 글 ⓒ www.mapthesoul.com
에픽하이의 독립선언

이번 앨범에 앞서 에픽하이는 거대 기획사와 결별하였다. 독자 회사 ‘mapthesoul’을 만들어 <魂 : map the soul>을 발표하였다. 활동의 무대와 방식은 분명 주류적이지만 그들이 이 앨범을 만든 방식(그러니까 가사, 제목 등등)의 행보는 다분히 ‘독립적’인 상황이다. 사실상 그들이 세운 회사 ‘mapthesoul’은 기존 매니지먼트회사와는 다르다. 에픽하이는 회사 홈페이지를 통해 앨범, 책, 옷 등을 직접 판매한다. 개인 블로그를 개설하여 팬들과의 소통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연예기획사와 연예인과의 불공정한 전속계약과는 소원하다. 유의미한 ‘독립’이다.

KBS에서 방송부격적 판정을 받은 세 곡은 이들의 ‘독립선언’과 같다. ‘저항’의 요소가 투영되어 있고, 미래에 대한 ‘의지’도 담겨 있다. ‘독립’을 선택한 배경 따위도 녹아 있다.

○ 빌리브(believe) : 하나 둘 팬들이 더 쌓여갈 때 / 음악과 맘은 같았지만 / 뭘 하든 깠네 / 그래도 뭐 어쩌겠어 / 잡초 같은 걸 / 아직도 빛나는 그 애들처럼 / 산소 같은 걸 / 그냥 좀비처럼 걸어 세상을 얻다 / 모든 걸 고통 없이 원한다면 / 해답은 없다 / 내가 해냈으면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believe
○ 사이퍼(Cipher) : 예술과 혼 내겐 탯줄 같아 / 더러운 매춘 같은 음악 대충 팔아 / 배 채우려 하지 않아 재출발선 / 다시 발을 맞춰 mapthesoul com
○ 탑 건(Top Gun) : I'm the Top Gun / drop another hot one / 덤빌 수 있다면 / show me what / what u got / I'm the Top Gun / competition Got none / 견딜 수 있다면

심의실에서는 평가 불가능한 appeal

KBS 심의실의 입장에서, 어렵지만 그래도 노력해서, 노래를 되감아 들어본다.

○ 빌리브(believe) : 새빨간 19금딱지가 붙었지만 still / 진실만을 썼다 / 음악은 나의 길 / 심의실에서 평가 / 불가능한 appeal
○ 사이퍼(Cipher) : mapthesoul.com
○ 탑 건(Top Gun) : 도로 위 택시처럼 랩을 뱉지 / 신호를 삼키고 원하면 / 차선을 빼앗지 / 이 샛길 저 샛길 상관 없어 / 새치기 할래 / In this 가요계 모두가 노예 / 우린 주인의 손 물어뜯는 가요 개

아무리 노력해도 특정단체에 대한 비방, 그리고 간접광고, 특정 직업에 대한 비방이라는 심의실의 설명에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정말 어려웠다.

▲ 에픽하이 "魂 : map the soul" 북앨범 ⓒ www.mapthesoul.com
우선 ‘사이퍼’에 등장하는 ‘mapthesoul.com’은 에픽하이가 만든 독자회사의 이름이 맞다. 이를 KBS 심의실에서는 ‘간접광고’로 해석하였다. 사소하게나마 ‘탑 건’에도 ‘mapthesoul.com’이 등장한다. 하지만 KBS 심의실은 ‘탑 건’에 대해서는 간접광고의 족쇄를 채우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일관성이 전혀 없는 심의라는 것이 순식간에 드러난다. 백만 번 양보해서 자신의 회사 홈페이지, 정확한 업계 용어로는 ‘레이블’이 가사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를 간접광고로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렇다면 빅뱅, 소녀시대, 원더걸스 등의 노래 가사에 ‘YG 패밀리’ ‘SM 타운’ ‘JYP’ 등 엔터테인먼트 회사 이름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어떻게 판단한 것인지 무척 혼란스럽다. 심의실에서 중요하게 따지는 것이 홈페이지 주소인가? 그렇담, 자사 드라마에 차고 넘치는 간접광고들 역시 홈페이지 주소가 노출된 것은 아니기에 KBS 심의실에선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것일까.

‘탑 건’의 과제는 풀기가 더욱 어렵다. ‘탑 건’에 등장하는 직업군은 ‘택시기사’ ‘가수’ ‘의사’로 압축할 수 있다. 직업군에 대한 가사를 아무리 유심히 훑어봐도, ‘비방’이라는 평가가 어떻게 성립되는지 최소한의 단서조차 찾기 어렵다.

결국 “진실만을 썼고, 심의실에서 결국 평가 불가능한 표현이다”라는 ‘빌리브’에 담긴 에픽하이의 노랫말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예측한 예언이 됐다. ‘심의실’를 향한 불쾌한 심기를 드러낸 가사가 ‘특정단체 비방’이라는 KBS 심의실에 판단은 마치 광우병 편을 다룬 <PD수첩>이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과 같고, 공정하지 못했다는 정치적 굴레를 씌어 앵커자리를 빼앗긴 신경민을 보는 것과 같다.

심의, 진부함의 극치

그리고, 유의미한 독립군으로 돌아온 에픽하이는 ‘고립’이 아닌 ‘조롱’을 선택했다. 에픽하이는 지난 17일 <이하나의 페퍼민트> 방송 녹화에서 그들의 노래가 아닌 동방신기의 ‘주문-미로틱’을 불렀다. 물론 그들의 스타일을 충분히 살려서. 동방신기 ‘주문-미로틱’은 지난해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로부터 선정적이라는 이유로 청소년 유해물 판정을 받았고, 이후 SM엔터테인먼트가 행정법원에 처분 취소 소송을 내 승소판결을 이끌어낸 곡이다. 심의의 구조적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동방신기 ‘주문-미로틱’을 에픽하이가 선곡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거기에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은 ‘빌리브’의 가사 “첫 번째 앨범은 시큰둥, 두 번째는 대중들의 작은 집중 뿐, 세 네 번째부터 이 썩은 scene의 귀중품, 새빨간 19금 딱지가 붙였지만”을 ‘주문-미로틱’에 적절히 믹스한 것은 통쾌한 조롱이었다.

에픽하이가 또 다른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여지는 있다. 에픽하이의 이번 앨범에 수록된 ‘빌리브’는 KBS뿐 아니라 MBC, SBS에서도 방송 부적격 결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SBS는 KBS와 같이 특정단체에 대한 비방을 이유로 삼았지만, MBC는 특정 상품을 드러낸 간접광고와 욕설을 또 다른 근거로 내세웠다. MBC 심의평가부는 “심의불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그렇다고 MBC가 내린 판정이 적절했단 것은 아니다.

허나 상상해보라. 노래를 듣고 모든 이가 똑같은 평가를 내린다면, 차라리 귀를 닫아버려야 할 것이다. 문화의 다양성과 취향의 감수성을 존중하지 못한다면 대중문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획일화’라는 진부한 단어가 수십년 째 한국 사회의 주요한 문화적 요소로 설명되는 것은 아마도 창작의 원천을 억압하는 심의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건 공포다. 무릇 심의란 사회문화적 토론의 과정이 전제되고, 사회적 맥락과 문화적 감수성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허나 우리의 심의는? 누구는 음반이 판매되기 전에 청소년유해매체를 구분하여 19금 딱지를 붙이고, 누구는 음반이 유통되고 난 후에 청소년유해매체를 구분한다. 또 누구는 방송에 적합한지를 따진다. 이중 삼중의 복합적 억압의 검열 과정에서 향유자들은, 시청자들은 음악을 빼앗기고 있다.

에픽하이에게 방송을 허하라. 누가 심의를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무책임한 잣대로 가두기엔 그들의 재능이 무척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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