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국제협정들을 알파벳 대문자 약칭을 갖는다. 그 약칭을 가장 애용하는 집단은 아마도 미디어일 것이다. 미디어는 때때로 약칭을 국제협정의 복잡한 정치적 회로를 단숨에 해제하는 만능키로 사용하고 또 경우에 따라선 연속된 문제들의 유구한 역사적 맥락을 간략화하는 한 장의 세련된 이미지처럼 쓰기도 한다. 어쩔 땐 그냥 군대에서 하는 암구호 놀이처럼 마구잡이로 활용하기도 하고.

각설하고, 예컨대 유사 이래 가장 유명한 약칭이라고 할 FTA의 경우를 살펴보자. 한국사회에서 FTA의 역사적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무현이 아니라 김대중을 건너 김영삼까지 거슬러 가야 한다. 1993년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그 해 5월 24일 서울에서 개최된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총회에서 <태평양 시대의 한국의 신외교>란 제목의 기조연설을 했다. 바로 이때 그 유명한 ‘세계화’ 노선이 천명됐다. ‘개혁을 통해 세계화를 선도’해 가겠다는 국가적 진로는 이후 OECD, 우루가이라운드, IMF, DDA(도하개발어젠다) 등의 다양한 알파벳 약칭들과 접속 혹은 변주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FTA로 귀결된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노무현에 이르러 FTA가 튀어나온 것이 결코 아니었다. ‘세계화’의 주술 아래 선진국병이 사회적 병폐가 됐고, 농민들이 사회 하층 계급이 되고, 나라가 국제적 빚쟁이로 전락했던 고난의 과정이 FTA앞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디어들은 FTA를 이미 실패한 미래 혹은 김영삼 이래 반복된 ‘진부한 낯섦’으로 설명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FTA를 미래를 위한 선택과 세계를 향한 도전이라는 역동적 프레임 위에서 작동시켰다.

왜 그랬을까? 하루가 순간처럼 바빠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냥 관행적으로 무심하기 때문에. 뭐, 하여간 당시 미디어들이 FTA 문제를 국제적 정치 회로도에 따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문제의 지구적, 역사적 맥락을 보다 세심하게 살폈더라면, 이후 국내의 사회문화적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최소한 촛불의 양상이 달랐을 것이고, 백주대낮에 앵커가 잘려나가는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 4월 15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
어제 오늘 미디어에 PSI라는 약칭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FTA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PSI 역시 상당한 역사와 전통을 갖는 용어이다. PSI는 ‘대량 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의(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의 줄임말이다. FTA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PSI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MD, WMD, NPT와 같은 계열 약칭들의 시간적 배치를 이해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9·11테러와 이라크 전쟁까지 더듬어야 한다. 지정학적 비애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PSI는 한미FTA는 물론 평택미군기지 이전과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 9월,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UN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WMD 확산 방지를 위한 UN 결의안’ 채택을 요구(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통과는 되지 못함)한 이래 수년 동안 PSI는 남북관계의 고빗길마다 등장했던, 최고 핫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남북 간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PSI가 들먹여졌다. 참여정부 내내 이 딜레마는 계속됐다. 종으로는 한미 동맹의 의미와 위상이 걸쳐 있고, 횡으로는 북한은 물론 중국, 러시아와의 긴장 관계가 걸려있는 복잡한 함수였다. 그래서 나왔던 훌륭한 고육책인 참가는 하되 옵서버로 남는, 참가를 않으면서도 실제론 참가하는 어정쩡한 태도였다. 진보 보수 양쪽에서 모두 욕을 먹던 참여정부만의 독특한 포지션이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이명박은 욕할 자격이 없다. 그건, ‘실용주의’였으니까.

햇볕 정책을 대북 퍼주기로 단순 도식화 하는 쪽에선, PSI 가입만이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대한 정면 대응이란 주장을 반복해왔다. 조선일보에서 PSI를 검색해보니 2004년 이후 PSI란 단어가 들어간 기사가 무려 934건에 이른다. 이 정도 양이면 일일이 찾아보기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널렸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나머지 신문들까지 치자면, PSI에 대한 보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양이다.

하지만 하나하나 찾아볼 필요는 없다. 대개가 엇비슷하다. 흔한 말로 미국이 감기몸살을 앓으면 한국은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격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은 우리 모두의 대한민국이라기 보단, 한국의 특정 신문들을 일컫는다고 보는 게 현명할 것이다. 그 고질병은 조중동의 PSI 보도에서도 역력히 확인된다. 말하자면, 조중동은 미국의 ‘정당한 정보원’이다.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는 조중동의 지침에 충실하다. 미국의 입장이 조중동이라는 ‘정당한 정보원’을 거쳐 정부에게 흡수되는 과정이 하나의 악순환적 과정이다. 2003년 9월 부시 전 대통령의 연설 이후 조중동은 지속적으로 PSI 가입을 선전, 선동해왔다. 북한이 로켓을 발사하면, 즉각적으로 PSI에 참가하겠다던 이명박 정부의 입장은 지난 몇 년간의 선전, 선동이 응축된 결과이다.

원래, 오늘(15일) 참가를 확정 발표하기로 했는데, 주말까지 연기된 모양이다. 유명환 현 외교부 장관은 참여정부 당시 외교부 1차관이었다. 국제 공조를 통해 북한, 이란, 시리아 등을 고강도로 압박하는 체계인 PSI에 가입하는 순간의 당파적 결정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할 수 있음을 잘 아는 그도 내심 괴로울 것이다. 외교부 장관으로서의 실존과 외교전문가로서의 인식이 그의 안에서 출동하고 있을 테다.

자, 그래서 중요한 것이 보도 태도, 즉 관점이다. 미디어는 무엇을 위해 복무하는 것인가의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미디어의 기본은 공동체의 평화를 염려하는 것이다. 뉴스는 사회적 환경의 불확실성과 위험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고, 지상파 3사까지 나란히 PSI 가입을 이미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보도 태도이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고, 결정되면 더욱 곤란함일 뿐이다. PSI는 현재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단숨에 해제할 만능키가 아니다. 외교 전략의 일환으로 로켓을 발사한 북한을 압박하는 단 하나의 상징적 조치는 더더욱 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내 모든 언론이 미국의 ‘정당한 정보원’은 아니지 않는가? 북한 로켓 발사와 PSI 참여를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이익을 위해서인가? 간단히 말해서 PSI가 한반도 평화와 국민의 안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은 기초적 상식 아닌가?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