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배 보도국장님께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편지가 조금 겸연쩍긴 합니다. 더군다나 이래저래 편치 않은 상황을 뻔히 알면서 안부를 묻기도 민망한 일이지요. 거두절미하고, 시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대관절 연의 옷깃조차 스치지 않은 사이에 무슨 편지냐고 되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제 소개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는 보시다시피 <미디어스>란 작은 매체에 글을 쓰고 있고, 책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유례없는 경기 불황에 나름 피해자인지라, 아직 한 권의 책 밖에 세상에 던지지 못했습니다. 제가 세상에 던졌던 유일한 출판 기획이 바로 <mbc, MB씨를 부탁해>라는 졸저입니다. 아마도 들어 보셨을 테지요. 지난 촛불 정국에서 ‘공영방송 mbc와 함께하는 민주사회를 꿈꾸었던’ 쟁쟁한 필진들이 참여한 책입니다. 부족한 시간과 제 미력함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해 아쉽고, 필진들에게 송구하지만, 읽어볼 가치는 충분한 ‘졸저’입니다.

그 책은 아주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된,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원동력은 mbc에 대한 광장과 온라인의 열렬한 환호였습니다. 유례없는 일이었습니다. 방송사 자체에 팬덤이 형성되는 기이한 과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저조차 당혹스러워 할 때였습니다. 그 성원과 신뢰 뭐랄까, 낯설어서 불안하다고 해야 할까. 뭐 하여간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기획자로서 저에게 주어진 미션은 2가지였습니다. 우선, 책을 낸다. 그리고 한 달 안에 낸다.

감히 말해보건대, 제가 보기에 <PD수첩>의 보도는 공영방송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상식적 ‘공적 서비스’ 이상의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즉자적인 반응과 이후 줄줄이 폭로된 헤아릴 수 없는 일련의 부조리들은 민주사회의 정상적인 언론 행위였고, 사회적 과정일 뿐 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시니컬한가, 이래저래 알고 지낸 글깨나 쓰는 분들께 메일을 돌렸습니다. mbc가 이래저래하니 책을 좀 내자고.

그때, 놀랐습니다. 반응이 한결 같았습니다. 불가항력적 시간의 문제를 제외하면, 제안한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크게 보면 승낙의 이유도 같았습니다. mbc가 꼭 잘해서라기 보단, mbc에 뭔가 힘을 보태야 할 것 같다는. 집단지성이란 이름으로 총 25명이 책에 참여했습니다. 그 필진들의 면면을 소개하는 단적인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책임편집을 맡았던 분이 기획초안을 보고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이 필진들에게 글을 받아만 오라. 그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 달 안에 어떻게든 책을 내주겠다’고. 한 달보단 조금 더 걸리긴 했지만 책은 촛불이 시작된 이후에 기획되어 촛불이 끝나기 전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전영배 보도국장님,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분기탱천한 촛불의 상황에서 ‘콩 볶듯 엽기적’으로 책이 만들어진 상황을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 미완으로 존재하는 공영방송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총체적으로 억압적인 행보를 보이는 정권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집단지성이 mbc에 품던 불안이었습니다.

제가 책의 기획안을 작성한 지 딱 1년이 되어갑니다. 사회 다른 부문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 때의 mbc와 지금의 mbc는 같습니까?

예, 맞습니다. 다릅니다. 아주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겨울, 2번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PD들이 제작이 아니라 투쟁을 이유로 방송사에서 하얗게 밤을 새우고 있습니다. 기자들은 제작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앵커가 잘려 나갔습니다. 왜 당신에게 그 얘길 하느냐고요? 당신은 보도국장일 뿐 책임은 사장에게 있는 것이라고요? 맞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어쩜, 1년 새 mbc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사장을 포함한 경영진과 구성원들이 완전히 분리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니, 처음부터 그게 정권의 노림수였습니다. 지금, 당신은 그 사이를 베는 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당신이야, 펄쩍 뛰고 억울한 척 하지만 묘하게도 당신이 보도국장에 임명된 사실 자체가 의아스럽더니 이후에 변화는 더욱 황량합니다. 우연입니까? 외부자적 시선일 뿐입니까? 아닙니다. 기자들이 당신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내부 구성원들의 분노가 당신에게 맺히고 있습니다. 지휘 통제해야 할 보도국원들이 당신의 불신임을 압도적으로 통과시켰습니다. 그래도 자리만 계속 보존하실 겁니까?

▲ 14일 오전11시30분 MBC기자들이 여의도 MBC 본사 1층에서 손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송선영
당신의 적극적 의지였는지, 누군가로부터 위임받은 서슬이었는지 아직은 불분명하지만 당신은 내부를 베는 칼이 되었습니다. 정권의 노림수를 현실에서 적확하게 주술하는 대리인이 되었습니다. 문득, 당신을 보며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민방위 훈련을 하면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라고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군부 때의 일입니다. 키득거리긴 했지만, 무서웠습니다. 북한이, 아니요. 보통사람 대통령이, 아니요. 교탁에서 지휘봉을 들고 호통 치는 담임선생님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아무리 거시적인 것이라도 현실일 수밖에 없고, 누구에게나 눈앞의 억압이 제일 매섭고, 가혹한 법입니다. mbc 구성원들이 정권의 문제를, 엄기영 사장의 문제를 알면서도 당신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그런 맥락일 겁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알아서 엎드리게 되는, 공포가 내면화되는 단계를 거부하는 가장 즉자적인, 현실적인 몸부림 말입니다.

무례한 편지의 결어를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전영배 보도국장님, 물러나십시오. 당신이 물러나지 않으면, mbc 구성원들은 비본질적인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전에 썼던 글에서 신경민 앵커가, 그 클로징 코멘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앵커를 전달자로 만들더라도 클로징 코멘트가 밋밋하더라도 클로징 코멘트 앞의 광활한 시공간을 채우는 기자들의 아이템 결정권과 보도의 결과물이 훨씬 중요하단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걸림돌입니다. 현실의 방해자입니다. 앵커 교체의 결정이 번복될 수 있을까 싶지만, 당신이 물러난 이후 클로징 코멘트 앞의 시공간에 기대를 걸고 싶습니다. ‘MB씨에게 mbc를 부탁’하려는 당신의 mbc말고, 피켓을 들고, 송출을 거부하고 있는 이들의 mbc, 그러니까 MB씨를 부탁해 볼 만한 이들에 대한 믿음으로 말입니다. <mbc, MB씨를 부탁해>의 기획안을 쓸 때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았습니다. 다소 결례인 줄 알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용단, 부디 조속한 결정 기대하겠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시작했으니, 긴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꾸벅~

완군 드림

추신>
알아서 엎드려 다음에 어떤 순서가 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기대와는 달리 더 강한 걸 시킵니다. 바로, ‘원산폭격’입니다. 전체를 엎드리게 만든 다음에는 머리카락 보이는 사람, 떠든 사람, 때때로 그냥 맘에 안 드는 사람을 따로 호명해서 ‘원산폭격’을 시키는 것이 지배자의 일반적인 심보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서슴없는 야만이 자행되던 시절에는 ‘자비’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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