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피맛골 어느 술집에서 인권변호사인 정정훈 변호사와 저녁도 거른 채 파전 한 장 앞에 놓고 소주를 마셨다. 몇 번 소줏잔을 부딪치고 나자 대화 주제가 장자연 리스트의 ‘○○일보 ○ 사장’으로 넘어갔다. <미디어스>는 이종걸 민주당 의원의 발언 부분에 대해서는 ‘○○일보 ○ 사장’으로 보도했고, 조선일보사가 이종걸 의원에게 공문을 보낸 행위 등에 대해서는 ‘조선일보사’ 이름을 적시했었다. 앞서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피의자의 이름은 ‘강○○’이란 표기를 끝까지 지켰다. (▷유영철 사건 비사로 돌아본 ‘얼굴공개’) 정 변호사는 미디어스의 ‘일관성’을 높이 샀으나 나는 고민이 깊었다. 강○○ 보도 때는 ‘잘난 체한다’고 욕을 먹었는데 이번엔 ‘비겁하다’고 욕을 먹고 있다. 조선일보사의 발빠른 ‘반응’이 없었다면 자괴감마저 들뻔했다.

하지만 그뒤 사태 전개 과정을 보면서 실명과 익명이 진실 추구의 결정적인 변수는 되지 못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있는 사실을 비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면 그 보도는 한걸음 한걸음 진실에 다가가게 돼 있고, 드러날 이름은 누가 억지로 들추지 않더라도 제 진실에 겨워 어떤 식으로든 마침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장자연 리스트 사건에서 이종걸 의원이 공개한 것은 ‘○○일보 ○ 사장’의 빈칸 세 자리가 아니라, 경찰 수사에 ‘성역’이 있다는 것과 그 ‘성역 지대’가 어디인가였다. (리스트 내용의 진실성은 그 이후의 문제다.) 그 ‘사실’을 인권인지적 관점에서 그대로 보도하자, 당사자는 정작 ‘실명’으로 반응했다. 그것은 일종의 ‘커밍아웃’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절정은 지난 13일치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의 칼럼 ‘조선일보의 명예와 도덕성의 문제’에서 맺혔다.

▲ 4월 13일자 조선일보 34면.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소년이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치자 사람들은 맞장구를 치고 임금은 얼굴을 붉히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모든 동화가 해피앤딩이되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상의 구체적 기술이 없듯, 안데르센도 그 소년이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이 없다. 절대왕정 체제였다면 물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허영심 많은 임금이 반드시 폭군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자신의 허물을 일깨워준 소년에게 오히려 큰 상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의 칼럼은 동화적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종걸 의원의 실명 공개 이후 조선일보사의 일련의 대응은 <벌거벗은 임금님>의 엔딩이 현실에서는 또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아가 김대중 고문의 칼럼은 현실은 동화보다 훨씬 그로테스크하다는 것을 세상에 일깨운다. (동화는, 그리고 현대판 동화인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현실의 이런 연장성과 그로테스크함을 은폐하기 위한 지배도구라는 의심이 더 깊어진다.)

김 고문의 이 칼럼은 그의 글이 갖고 있는 강점이자 동시에 단점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의 글은 에둘러 감이 없이 곧장 지르고 가고, 가정(假定)을 기정사실화해 논리를 주관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탁월하다. 말하자면 현실의 곡선을 직선의 글로 펴는 능력이다. 그동안 조선일보사는 장자연 리스트와 관련해 자사의 이름과 사주(社主)의 성씨가 공개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오히려 공적으로 자사의 이름을 드러내는 실수까지 저질렀지만, 김 고문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조선일보의 한 고위인사’가 장자연 리스트에 포함돼 있음을 당당하게 밝힌다. 이종걸 의원과 함께, TV 토론프로그램에서 ‘○○일보 ○ 사장’의 빈칸 세 자리를 채워서 말한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을 고소한 조선일보가 김 고문에게는 어떤 조처를 취할지 알 수 없지만, 김 고문의 이 글을 통해 조선일보는 이 글 이전에 세상과 그었던 대치선을 깨끗이 지우고 새로 선을 그을 수 있게 됐다.

이런 전술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김대중 고문과 조선일보의 전매특허다. 김 고문이 80년 5월 당시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규정했던 사실이 훗날 조선일보 반대운동이 벌어지면서 단골로 거론되자, 그는 당시의 상황논리를 들어 이를 시인함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다시 곧장 ‘좌빨 색출’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친일부역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조선일보는 자신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마지못해 시인하고 스스로 면죄부를 준 뒤 비판자를 색깔론으로 역공하는 패턴을 줄기차게 되풀이해왔다.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는 조선일보의 광고 카피는 이런 맥락의 깔대기를 거쳐 나온 증류수다. “우리가 아무리 나쁜 짓을 했어도 우리는 누구든 좌빨로 채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고문의 이번 글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녹록지 않게 돌아가자 먼저 장자연 리스트에 조선일보의 고위인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아무런 정황이나 구체성이 없기에 그 고위인사가 억울한 피해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상황논리를 댄다. 그 다음 가정법으로 들어간다. “그 문건이 과연 장씨 자신의 의지에 의해 쓰인 것인지, 아니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썼다가 그것이 유포되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 것이 두려운 나머지 자살로 도피한 것인지, 그 배후는 누군지 등등 의문점이 수두룩했다”고 했다. 대단하지 않은가. 숱한 개연성 가운데 하나를 고른 뒤 그것을 기정사실화해 ‘배후’까지 거론한 것이다. 그러고는 곧장 가정을 기정사실화한 역공으로 질러간다. “그러나 이것이 터무니없는 모함과 모략, 그리고 그에 편승한 권력적 게임의 소산으로 밝혀지면 그것을 주도하거나 옮기거나 음해한 측 역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무리는 언제나 교훈적 말씀이다. “언론은 이 사건을 겪으면서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말씀은 다분히 가정적인 경고다. “이종걸 의원과 이정희 의원이 교묘한 말장난으로 조선일보와 실명을 거론해 이 사건에 얽어매려 했지만, 만일에 그들이 어느 문건에서, 또는 어느 매체에 의해 어느 누구와 어디서 어떤 일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명백히 규명될 때까지 우리 모두는 실명보도를 자제하는 언론풍토를 만들어 가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의 교훈적 말씀은 언제나 그와 조선일보에게 부메랑이지만, 이를 괘념치 않고 할 말은 하는 그 당당함이 또한 그의 글이 가진 고유한 강점이다.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피의자 강○○의 실명과 얼굴사진을 가장 먼저 공개한 언론은 다름아닌 조선일보였다.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이제 <벌거벗은 임금님>은 동화 이후의 현실 기술을 넘어서 ‘끝말잇기’로 넘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장자연 리스트 수사의 최고 책임자인 강희락 경찰청장은 김 고문이 칼럼을 썼던 당일 국회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조선일보사 고위간부가 있다고 시인했다. 강 청장이 김 고문의 글을 모종의 신호로 읽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민주노동당은 다음날인 14일 조선일보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조선일보 쪽에 “이정희 의원, 이종걸 의원, 서프라이즈 대표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과 마찬가지 논리로 강 청장을 고발하라”고 촉구했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후가 아무리 어지럽고 복잡하게 전개되더라도 명백한 사실은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는 것이다. 장자연 리스트 사태에서 명백한 것은 장자연 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이라면 성역없이 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보 ○ 사장’ 빈칸 채우기 퀴즈가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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