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법정으로 가는 모양이다. 청년수당 도입 여부도 판사들 손에 맡겨지게 됐다. ‘좋은 정치’를 통해 해결돼야 할 문제들이 그렇지 못한 채 헌법재판소나 대법원 등 법정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누가 달려가면 좋은 일이고 누가 달려가면 나쁜 일이라고 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 판사들은 법률 전문가만이 아니라 최고의 ‘정치가’(statesman)의 자질까지 갖춰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외벽에 보건복지부로부터 직권취소 조처를 받은 청년수당에 대한 서울시 입장을 담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궁금해졌다. 보건복지부는 왜 반대할까? 여러 가지 언론보도 중 눈에 들어오는 게 하나 있었다. 8월 4일자 동아일보 사설 ‘청년수당 강행한 박원순, 속보이는 대선행보 그만두라’는 제목의 칼럼이었다. ‘대선출마를 겨냥한, 성과도 불투명한 박원순의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와 닿은 이유가 내용에 동의해서가 아님은 물론이다. 정치, 그것도 ’나쁜‘ 정치와 연결하지 않으면 청년수당 도입에 대한 비난에 가까운 공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봐왔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보는 독해법은 ‘우리가 해야 하는데 니들이 하면 어떻게 하냐? 당장 그만둬!’라는 으름장이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이슈 선점에 대한 히스테리컬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2012년 대선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라는 야당의 이슈를 선점하고 톡톡한 재미를 본다. 하지만 시간의 검증을 견뎌내지 못한다. 이행에 대한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은 채 표를 긁어모으기 위해 동원한 탓이다. 동아일보 표현대로라면 ‘포퓰리즘’의 전형에 해당한다. 검증의 시간은 당내에 분란을 낳는다.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이었던 소설가 복거일 씨가 최근 새누리당 주최 토론회에서 경제민주화 공약이 새누리당의 정체성 혼란을 가져왔다고 주장한 것에서 보이듯 말이다. 딜레마는 여기서 시작된다. 현실 문제를 해결하면서 당 정체성을 강화시킬 뾰족한 해법은 마땅하지가 않다. 그런데 야당이 자치단체장으로 있는 성남시나 서울시에서 참신하고 유용한, 그리고 상당한 지지까지도 얻을 수 있는 발상이 나온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장 실천하고 적용까지 하려 한다. 참을 수가 없다. 막아!‘

그러니 도입에 반대하는 명분이나 근거는 군색이나 박약과 사촌지간을 이룬다. 보건복지부가 반대한 법적 근거는 ‘합의’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복지부는 사회복지기본법에 규정된 ‘협의’가 사실상 ‘합의’ 규정이라면서 ‘합의하지 않았으니 취소’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 법원에서 ‘협의’를 ‘합의’로 풀이한 사례가 있는지 내가 아는 사례로는 없다. 그런데 청년판 기초소득이라고 할 수 있는 청년배당 정책을 지난해 도입한 성남시에 대해서는 취소를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어도 못했다. 이번에 알아보니 서울시처럼 광역자치단체에만 해당하지 기초자치단체의 복지 관련 정책에는 직권취소 권한이 없기 때문이란다.

이것만 봐도 복지부는 불리해진다. 기초자치단체는 재정 여력이 허락하는 한 복지 관련 자체를 자율적으로 도입하되, 다만 파급력이 있는 광역자치단체의 경우 중앙정부와 긴밀히 협의하는 게 필요하다는 게 사회복지기본법의 취지로 풀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판사라면 당연히 이렇게 유권해석을 하겠다.

복지부가 들이댄 반대 논리는 ‘도덕적 해이 초래’니 ‘선심성 복지정책 조장’이니 하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여기에 ‘포퓰리즘’이라는 주장까지 덧붙이며 쌍수를 들고 맞장구를 쳤다. 현실에서 지지를 얻기엔 너무 취약한 주장이다. 버젓한 일자리가 태부족하고 공무원 시험 응시자는 넘쳐나는 상황에서 ‘성공적인 창업 정책만이 청년 실업을 완화하는 거의 유일한 방안’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논리적으로 보면 서울시 청년수당은 그리 새로운 아니다. 성남의 청년판 기초소득제와 달리, 직장을 잃은 뒤 적용되는 구직급여를 직장을 얻기 전에도 적용해 보자는 정책 발상이다. 보험료를 내야 연금 자격이 생기는 사회보험인 국민연금의 맥락에서 벗어나 기초노령연금(노령수당) 정책을 발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남의 청년배당은 일종의 시민소득에 가깝다. 하지만 동일한 맥락이다. 일자리 태부족의 현실에서 일자리를 얻고 최소한의 생활을 하기 위한 청년의 고통을 줄여보자는 것이다. 게다가, 청년수당이나 청년배당은 부모세대가 자신의 노후에 대비하거나 현재소비를 늘릴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을 주는 간접적인 효과까지 낳는다.

도입을 못하게 하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충분한 재원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서울시나 성남시와 같은 자치단체가 청년수당이나 청년배당과 같은 정책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재정여력을 벅차게 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다. 이재명 시장의 11일 단식으로까지 이어진 지방정부 재정개편안은 이런 맥락에 있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렇게 서울이나 성남과 같은 곳은 손톱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다.

‘좋은’ 정치는 현실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당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방안을 찾는다. 현실은 내버려둔 채 남을 비방하는 ‘나쁜’ 정치는 상상력의 고갈을 낳고, 상상력의 고갈은 반드시 ‘넌 뭘 하려 하는데?’라는 물음에 맞닥뜨린다. 현실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정당마다 해법이 모두 달라야 할 이유는 없다. 개인적으론 청년 실업 문제가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새누리당이나 보건복지부가 '문제를 보는 시각은 다르다. 하지만 지금은 한시적으로라도 청년수당이나 청년배당과 같은 해법에 의지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면 어땠을까? 이게 국민들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좋은’ 정치라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지금은 남과 나를 기준으로 불륜과 로맨스를 나누는 시대도 아니다. 자신들이 하고 싶어도 너무 민망해서 못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그렇지 않은 정치는 정녕 ‘나쁜’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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