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참여사회연구소가 펴낸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는 건국 6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미래좌표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책의 서장에 있는 '낡은 것은 무너졌으나, 아직 새로운 것은 세워지지 않았다'는 그람시의 경구가 문제제기의 출발점이다. 본래 진보개혁진영이 한국 근현대사의 빠른 변화를 따라잡지도, 미래 전망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것을 반성하는 뜻에서 인용된 것이다. 하지만 책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좌표와 방향을 잃고 총체적인 위기에 빠진 한국사회 전체를 진단하는 구절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역사와 좌표 (참여사회연구소, 한울)

대한민국은 심각한 위기에 놓여있다. 낡은 것은 거의 모두 무너졌으나 아직 새로운 것은 세워지지 않았다. 우리 경제의 성장률이 2%대로 떨어졌다. 일시적인 경기침체로 보이지 않는다. 고도성장기의 주역을 자처했던 재벌은 이제 면세점 영업처럼 지대(rent)수익만 쫓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조선일보 같은 보수 언론도 "재벌 기업이 나라 경제의 성장을 주도한다는 믿음은 어느새 무너지고 있다"고 토로한다. (재벌·관료·정치 삼각편대의 동반몰락, 송희영 칼럼, 조선) 무너진 재벌중심, 수출주도, 부채의존의 성장모델을 대체해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되살릴 새로운 성장모델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90년대 후반, IMF경제위기 이후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불평등을 비교분석한 IMF보고서(2015)는 우리나라 상위 10%의 소득점유율은 45%라 밝혔다. 95년의 29%에서 불과 20년 만에 16%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90년대 중반까지 한 자리수로 일본 심지어 프랑스보다 좋았던 상위 1%의 소득점유율은 12%로 높아졌다.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나쁘다. 자산 즉, 부(富)의 불평등은 더하다. 동국대 김낙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자산 상위계층 10%가 우리나라 전체 부의 66%를 소유하고 있다. 반면 하위 50%가 소유한 부는 전체의 2%에 불과하다.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은 이미 우리사회가 참고 견딜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대한민국의 통합과 존립을 위협하고 있으며, 성장에도 큰 짐이 되고 있다.

관료, 검찰, 법조인, 교수, 언론인 등 사회 각 영역에서 지도적 역할을 감당해온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무능과 부패,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다. 그동안 한국의 관료집단은 비록 약간 부패하고, 종종 권한을 남용하는 문제가 있지만 나라를 운영할 능력은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지난 해 벌어진 메르스 사태와 최근 조선산업의 부실을 다루는 모습을 볼 때 도덕성은 물론이고 능력 또한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여실이 입증되었다. 도둑을 잡으라고 임명된 검찰의 최고 엘리트가 누구보다 파렴치한 도둑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적지 않은 수의 교수들이 제자들의 인건비를 착취하고 성희롱을 일삼다가 구속되었다. 현 정권의 재갈물리기에 일부 원인이 있지만 언론의 비판적 기능은 크게 약화되었다. 과거에도 비판은 있었지만 우리사회 지도적 집단의 권위가 이처럼 철저히 무너진 적은 없었다. 이들을 대체할 새로운 집단은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 정치가 제 역할을 했다면 이런 상황이 아예 벌어지지 않았거나 쉽게 이겨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한국정치가 너무 무기력하다. 부분적으로는 더 이상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는 이른바 87체제가 원인이다. 87체제 아래서 국민의 염원이었던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을 이뤘다. 87체제의 밝은 면이다. 그러나 갈수록 체제의 어두움이 밝음을 압도하고 있다. 대통령이 임기의 절반은 제왕이 되고 나머지 절반은 레임덕이 되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허약한 의회는 행정부를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양대 정당은 극단적 대결정치와 답합 사이를 오가며 기득권을 유지하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다.

주체적으로 상황을 돌파해야 할 정치집단의 무능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지난 총선에서 국민은 소통하지 않고 무능한 정부여당을 심판했다. 더불어민주당이 비록 전체적으로는 반사이익을 거뒀지만 야당의 텃밭인 호남에서 참패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부분적 심판의 대상이었다고 보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국민의당이 많은 기대 속에 등장했지만 무너진 낡은 정치를 대신하기에는 마땅한 참신함도, 수권정당다운 노련함도 보여주지 못했다.

낡은 것은 무너졌지만, 아직 새로운 것을 세우지 못한 우리에게 밖으로부터 새로운 위협이 닥친다면 어찌될 것인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준 97년 IMF금융위기는 김영삼 정권이 레임덕에 빠져 국정에서 손을 놓아버린 것이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었다. 지금 대한민국 앞에는 이보다 훨씬 더 큰 위협들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고령화와 인구절벽이 대외적으로는 중국경제의 경착륙과 동북아의 평화위기가 이미 진행 중이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 오는 대선이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뜻을 모은다면 대선을 대한민국의 새로운 좌표를 찾고, 위기대처와 국가경영 능력을 복원하며, 국민을 설득하고 이끌 권위를 다시 세우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정치권뿐만 아니라 언론, 전문가, 시민사회 등이 모두 협력해야 한다. 새로운 성장모델, 불평등 해소, 관료 및 검찰개혁, 언론개혁, 개헌, 한반도 평화, 한국정치의 재구성 등의 방안을 갖고 각 대선후보와 정당들은 비전과 정책경쟁을 하고,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를 비교분석해 국민들의 지혜로운 선택을 돕고, 시민사회가 이 모든 과정의 훌륭한 감시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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